따뜻한 통일 | 당신이 통일 주인공
“인생도 멋지게 수선해야죠!”
5개 수선집 운영하는 ‘재봉의 달인’ 정혜영 씨
재봉사 8개월, 수선집 주인을 꿈꾸다
“사장님 계세요?”
점심시간이 막 끝난 오후, 여자 손님이 찾아왔다. 새로 산 치마의 허리춤이 크다며 줄여달라는 주문이었다. 혜영 씨는 탈의실에서 나온 손님의 옷매무새를 살펴보며 허릿단에 핀 두 개를 꼽았다. 디귿자로 이어진 수선실에는 넉 대의 재봉틀과 색색의 실들이 가지런히 정리돼 있었다.
혜영 씨는 고난의 행군 때 중국으로 시집을 갔다. 하지만 큰 아이가 4살 때 남편이 하늘나라로 떠났고, 졸지에 가장이 된 혜영 씨는 노쇠한 시부모와 어린 자녀들을 돌보느라 매일 네댓 가지 일을 해야 했다. 낮에는 농사와 양계 일을 하며 틈틈이 생수를 팔았고, 밤에는 부업으로 곰인형을 수선했다. 더없이 고단한 세월이었지만 그때 부업으로 했던 인형 수선이 지금의 남한 정착에 물꼬를 터줬다. 재봉기술을 배우는 발판이 돼줬기 때문이다.
▲ 치마 허리춤 사이즈를 재고 있는 정혜영 대표
▲ 바지 단추 바느질 작업
독한 마음으로 건너온 땅이었기에 한국에서의 삶은 더욱 치열했다. 두 아이를 데리고 오려면 자립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혜영 씨는 하나원을 퇴소하자마자 바로 학원 수강신청을 했다. 혜영 씨를 지켜본 하나원 직업상담사가 적극 권유해준 의류 리폼학원이었다.
상담사의 판단은 적중했다. 학원에서 가르쳐주는 의류 리폼과 재봉수업이 재미있고 적성에 맞아, 혜영 씨는 매일 늦게까지 남아 기술을 익혔다. 그리고 재봉틀이 손에 익을 즈음에는 실습을 요청해 여러 지점을 다니며 다양한 기술들을 배워나갔다.
“같은 기술자라도 사람마다 더 잘하는 부분이 있잖아요. 이 사람이 이걸 잘하면, 저 사람은 저걸 잘하고, 다른 사람은 또 다른 걸 잘해요. 그런 좋은 기술들을 배우려면 저 스스로 뛰어다니는 수밖에 없어요. 빨리 잘하고 싶다는 욕심도 있었고요.”
실습이 끝난 뒤에는 바로 수선센터에 입사했다. 대형 마트마다 입점해 있는 의류 리폼·수선집이였는데, 혜영 씨가 취직한 곳은 서울역에 있는 한 대형마트 내 점포였다. 그리고 4개월 후, 혜영 씨는 큰 결심을 했다. 점주가 내놓은 가게를 직접 인수하는 것이었다.
고난 끝에 맺은 결실, 5개 수선집 인수
하지만 주변 사람들이 극구 반대를 했다. 당시 혜영 씨는 재봉기술을 배운지 겨우 8개월밖에 되지 않은 ‘초짜’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혜영 씨는 고집을 피웠다. 어떻게든 잘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지만, 아이들을 위해 하루빨리 자리를 잡고 싶다는 마음이 절박했던 까닭이다.
혜영 씨는 중국에서 힘들게 장사하며 모아둔 돈을 탈탈 털어 매장을 인수했고, 회사와 학원에 자문을 구하며 수선집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수 후 두 달 동안은 지인들이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한여름에 가게를 인수한 탓에 찾아오는 손님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혜영 씨는 여기저기에 빚을 내 직원들 월급을 마련해야 했고, 사장인 혜영 씨는 무일푼으로 하루하루를 버텨야 했다.
“매일 아침 10시부터 저녁 10시까지 일했지만 한 달 임대료 내기도 빠듯하더라고요. 거기다 저는 못 가져가도 직원들 월급은 줘야하니까. 그때는 또 애들 데리고 온다고 브로커 비용까지 내야해서 돈 들어갈 일이 많았거든요. 눈앞이 캄캄했죠.”
▲ 정혜영 대표가 운영하는 신도림점 수선센터
당시 절망에 빠진 혜영 씨를 붙들어준 건 하나원 선생님들과 담당 형사였다. 혜영 씨가 선택의 기로에 설 때마다 조언을 구하는 사람들이다. 아이들 수속과정에 문제가 생겼을 때도 수선집을 그만두고 다 포기하겠다는 혜영 씨를 설득하고 붙들어 준 사람도 하나원 선생님들이었다.
“정유라 선생님, 남진애 선생님, 한옥자 선생님, 이신영 형사님은 제가 힘들고 급할 때마다 연락드리는 분들이에요. 제가 많이 지쳤을 때 ‘혜영 씨, 주저앉지 말고 끝까지 힘내요!’라고 말씀해주셨는데, 진짜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그 말이 생각나요.”
어려운 고비를 하나 둘 넘기고 나니 좋은 일도 생겼다. 수선집이 자리를 잘 잡아 다른 지점을 하나 더 인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은 5개 지점을 운영하며 혜영 씨와 같은 탈북민들을 이끌어주고 있다.
“저도 처음엔 아무도 없고 막막해서 많이 울었어요. 집에 가만히 있으면 괴로운 생각밖에 안 나거든요. 우리 탈북민들은 사람들 만나서 소통도 하고 우리 탈북민들은 주변과 소통하는 방법도 배우고 자주 사람들을 만나야 해요. 새까만 나라에서도 살았는데 여기서 왜 못 해요. 고향사람들하고 다 같이 잘사는 게 제 바람입니다.”
혜영 씨는 지금 ‘인생 리폼 중(?)’
▲ 수선 작업을 준비하는 정혜영 대표
혜영 씨는 요즘 방송통신대학교 의상학과 1학년에 다니고 있다. 의상 디자인에 대한 견문을 넓히면 더 좋은 재봉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매일 밤늦게까지 일하는 혜영 씨에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일단 할 수 있는 데까진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그리고 얼마 전엔 여성개발센터에서 취업에 관한 강연도 했다. 100세 시대를 맞아 제2의 직업을 찾고 있는 분들에게 혜영 씨가 어떻게 노력해 자리를 잡았는지 이야기하는 자리였다. 당시 강연장에는 혜영 씨 또래부터 나이가 더 많은 어르신들도 계셨는데, 그중 몇 분은 혜영 씨 가게를 직접 찾아와 재봉일에 대해 묻기도 했다고 한다.
“세상에 중요하지 않은 일은 없다고 생각해요. 저희 같은 기술자가 없으면 옷을 편안하게 입을 수 없고 아깝게 버려지는 옷도 많잖아요? 저는 제 눈이 보일 때까지 이 일을 할 거예요(웃음).”
통일이 되면 혜영 씨는 고향에 올라가 직업 훈련소를 만들고 싶다고 한다. 고향 사람들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잘 이끌어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혜영 씨 같은 탈북민이기 때문이다. 그날이 올 때까지는 동료들과 제2의 인생을 멋지게 ‘리폼’할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