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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의 달콤한 인생’을 꿈꾸다

양봉 전문가 김철진 씨 부부

괴산군 조천리의 5월은 사방이 꽃밭이다. 숲에는 하얀 아카시아꽃이 지천이고 마을 길목에는 샛노란 창포꽃과 앙증맞은 은방울꽃, 향긋한 찔레꽃이
그득하다. 이렇게 꽃들이 만개하는 봄철엔 김철진, 이애정 부부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벌들이 물어다주는 꿀과 꽃가루를 바지런히 거둬야하기
때문이다. 산골짜기 움막살이로 시작해 양봉 전문가로 거듭난 탈북민 김철진 씨의 ‘꿀농사 이야기’를 들어봤다.

김철진 씨 부부

꿀벌에서 희망을 발견한 탈북민 부부

부부에게 오늘이 있기까지는 고단한 시간이 많았다. 남편 김철진 씨는 하나원을 나와 노동일부터 택배기사, 마트 배달부 등 안 해본 일이 없었지만, 뚜렷한 기술 없이 벌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모든 게 ‘제로(0)’가 되어버린 듯한 상황. 앞길이 막막해 좌절감에 빠진 철진 씨는 ‘자유인’을 선언하며 무작정 시골 마을로 향했다. 그때 철진 씨에게 ‘평강공주’처럼 나타난 사람이 아내 이애정 씨다. 모든 걸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반쪽이자 친구를 만난 것이다. 북에서 군생활을 했던 애정 씨는 언제나 남편을 응원해주는 든든한 아내였다. 의지할 곳이 생긴 까닭인지, 두 사람이 부부가 되고부터 좋은 일들이 생겼다. 애정 씨의 아들은 큰 기업에 취직해 해마다 승진을 했고, 철진 씨는 남한에서 잘할 수 있는 일을 찾게 됐다. 바로 ‘꿀농사’다.

“마트에 갔다가 설탕과 꿀 가격을 보고 이거다 싶었어요. 북에서 작게 양봉농사를 지었었는데, 꽃이 피지 않는 겨울에는 설탕이 벌들 양식이거든요. 한국은 설탕이 싸니까 부담 없이 해볼 수 있겠더라고요.”

‘충북 괴산에 있는 김철진 씨 부부 양봉농장 ▲ 충북 괴산에 있는 김철진 씨 부부 양봉농장

‘벌통 점검하는 김철진 탈북민 ▲ 벌통 점검하는 김철진 탈북민

첫 양봉 실패 후 체계적인 교육 및 경험으로 아카시아꿀 4톤 수확

양봉을 하기로 결심한 부부는 일단 벌통 100개를 샀다. 50통부터 시작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쇠뿔도 단김에 빼랬으니 하루빨리 실행에 옮긴 것이다. 그런데 임대 아파트 보증금까지 빼 마련한 벌통이 모두 무용지물이 됐다. 남한 양봉에 적합한 벌통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 일로 부부는 한동안 빌려둔 터에서 움막집 신세를 졌다. 하지만 믿고 의지할 든든한 가족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시 일어설 힘을 얻었고, 1년간 갖은 일을 통해 열심히 번 돈을 모아 양봉에 필요한 자재들을 다시 마련했다.

부부가 양봉을 다시 시작하려던 찰나 좋은 기회도 찾아왔다. 괴산군 농업기술센터가 ‘양봉대학’을 개설한 것이었다. 덕분에 철진 씨는 남한의 양봉 기술을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었다. 그사이 아내 애정 씨는 다른 양봉농장에 들어가 아르바이트를 했다. 좋은 기술은 언제나 경험을 통해 얻어지는 법이니 직접 농장에 들어가 몸으로 느끼고 배우겠다는 판단이었다. 부부는 이렇게 발품을 팔아 꿀농사를 시작했고, 2014년 5월 첫 결실로 꿀 4톤을 수확했다. 지금은 꿀뿐만 아니라 꽃가루 화분과 프로폴리스 등 다양한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마음을 녹인 꿀로 조천리 동네사람이 되다

“처음엔 남한말을 못 알아들을까봐 걱정을 많이 했어요. 근데 양봉 용어는 남북이 똑같더라고요. 북한에서도 ‘양봉학’을 공부했었는데 그때 기억 덕분에 박사님들이 알려주시는 내용들을 빨리 쫓아갈 수 있었어요.”

'알코올 증기로 벌통 소독 중인 부부 ▲ 알코올 증기로 벌통 소독 중인 부부 철진 씨가 양봉 농장을 경영하는데 가장 큰 도움을 얻은 것은 양봉대학에서 배웠던 계절별 꿀통 관리법이다. 북한과 기온 차이가 큰 남한에서는 화분떡을 주는 시기부터 꿀을 뜨는 수확시기, 병충해 및 벌통 관리법이 많이 달랐다. 특히 벌통은 벌들이 너무 많거나 적으면 병이 생기기 때문에 아기 키우듯 자주 들여다보는 것이 중요했다.

꿀농사 만큼이나 중요한 건 ‘홍보’였다. ‘입소문’ 없이는 장사가 잘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귀하게 얻은 첫 수확이지만 그 꿀은 아예 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일면식이라도 있는 사람들에게 김 씨 부부표 꿀을 보내주기 위해서다. 일단 꿀맞을 보여주자는 것이 부부의 전략이었다. ‘안 버는 것처럼 하는 게 장사’라는 철진 씨는 손님들이 꿀을 5병 주문하면 6병을 보내주고, 10병을 주문하면 12병을 보내주며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처음엔 남편이 이해되지 않았는데, 생각해보니 입소문보다 빠른 게 없잖아요? 돈은 아르바이트 해서 벌면 되지만, 소문은 돈으로 사는 게 아니니까. 그런데 정말 꿀을 돌리고 나니까 서울에서도 주문 전화가 많이 오더라고요. 연예인 관계자들까지 직접 찾아와서 저희 꿀을 사가시기도 했어요.”

부부표 꿀은 조천리 마을 사람들의 경계심도 누그러뜨렸다. 집성촌인 까닭에 외지인들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던 마을 사람들에게 부부는 늘 먼저 머리 숙이며 인사하고, 사소한 것이라도 다툼의 여지가 남지 않도록 애썼다. 꿀을 뜨면 동네 경로당과 마을 사람들에게 꿀을 선물하기도 했다. 덕분에 김 씨 부부는 탈북민이나 외지인이 아닌 ‘진짜 동네사람’이 됐다.

통일후 북한에서 장사의 꿈을 키우는 철진 씨

부부는 작년 10월 통일부에서 수여하는 ‘탈북민 정착사례’ 대상을 수상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남북한 기술을 접목해 양봉농사를 지으며 자기만의 길을 개척해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농촌진흥청에서도 매년 철진 씨네 농장을 방문해 양봉관련 정보를 주고 받고 있다. 덕분에 철진 씨 농장으로 양봉을 배우려고 찾아오는 농가들도 늘고 있다. 철진 씨는 북한에서도 이름 난 장사꾼이었다. ‘국군 포로’ 집안이라는 이유 때문에 장사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경상도 함안이 고향인 철진 씨의 아버지는 6.25 때 인천 상륙작전에 참가해 장진호전투까지 참전해 동부전선까지 나갔다 포로가 되었다.

'▲ 벌통을 점검하며 환하게 웃고 있는 부부 ▲ 벌통을 점검하며 환하게 웃고 있는 부부

“저희 아버지는 남한에선 훈장을 받았지만 북한에선 포로가 되셔서 여생을 탄광에서 고생만 하다 돌아가셨어요. 저 역시 포로의 자식이라고 평생 차별을 받았죠. 명문대학에 갈 수 있는 실력이었지만 못 갔고, 군대도 오지 말라고 했어요. 장사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죠.”

철진 씨는 통일이 되면 북한 청진에 가서 사업을 하며 어려운 이웃들을 돕고 싶단다. 남한에서 배운 기술을 갖고 올라가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해서다. 그 때까지 철진 씨 부부는 남한에서 열심히 달콤한 꿀농사를 지을 생각이다.

※ 웹진 <e-행복한통일>에 게재된 내용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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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발행 : 2017-06-15 / 제5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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