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남한으로 왔다는 남녀커플 강호 씨와 정연 씨(가명). 강호 씨는 키가 178cm에 약간 그슬린 얼굴, 다부진 체격을 갖고 있었고, 정현 씨는 작은 얼굴에 흰 피부, 크고 늘씬한 체형을 하고 있었는데, ‘키가 크다’는 칭찬에 재미있는 말을 들려준다. 북한에서는 ‘남자 키가 170cm를 넘으면 센티 당 부실하고, 여자 키가 160cm를 넘으면 센티 당 모자라다’고 한다는 것. 키가 지나치게 크면 야무지지 못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북한에서는 성장기에 많이 먹고 부쩍 자라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보니 신장이 대부분 작잖아요. 키가 작은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만 멀대 같이 크면 그 사람이 이상해 보이는 거죠. 군대에서도 제가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으니 눈에 확 띄더라고요.”
강호 씨는 국경 두만강 인근에서 10년간 장교로 군대생활을 했다. 아직 군인 티가 난다는 말에 “보통 군인들은 3년 석기(민간 생활에 적응하는 것)라 하는데, 장교들은 ‘종신석기’라고 부른다”고 했다. 군대에 10년을 다녀오더라도 남들은 3년이면 민간생활에 적응하는데 군관들은 평생 그 모습이 따라다닐 정도로 군인티를 벗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관련내용 : 24호 <3년 석기, ‘니들이 군대를 알아?’> 참조)
정연 씨 역시 외모 컴플렉스를 갖고 있었다. ‘목이 길고 이마가 볼록하다’는 남한 사람들의 칭찬에 “여기 와서 그런 소릴 또 듣는다”며 한숨을 쉬었다고.
“제가 목이 기니까 북한에선 친구들이 ‘남의 집 담벼락에서 뭐 먹을 거 없나 내다보는 목’이라고 불렀거든요. 얼굴이 작아 ‘참새골’이라 하고, 이마가 불룩하니 ‘소곰재(잠자리)’라고 놀려 댔어요. 그래서인지 남한에선 이런 외모가 예쁘다고 해도 기분이 좋진 않더라고요.(웃음)”
이 커플은 요즘 정연 씨의 옷차림 때문에 가끔 승강이를 하곤 한다. 정연 씨의 치마가 점점 짧아지고 있다는 게 강호 씨의 불만.
“북한에서는 기껏 입어야 무릎 아래 10cm로 입지, 다리 다 보이고 속옷까지 들여다보이는 거 입지 않거든요.”
정연 씨도 처음에는 남한식 옷차림에 적응하지 못했다고 했다. 북한에서 곰시(금방)왔을 때는 ‘속옷이 다 비치는 짧은 치마’나 ‘가슴이 발랑발랑한’ 노출 심한 옷을 입은 여성을 보면서 이게 바로 북한에서 말하는 ‘썩고 병든 자본주의’인가 싶었지만, 이젠 그 또한 자유로운 생활방식의 하나라고 생각이 바뀌었단다.
‘썩고 병든 자본주의’는 탈북민들에게 자주 듣는 말 중 하나다. 남한을 비하하는 내용의 교육을 오랫동안 받다 보니 가끔 그 말이 튀어나올 때가 있단다. 특히 개에게 옷을 입히고 금(?)목걸이를 채워 자가용에 싣고 가는 걸 보고 ‘사람보다 개가 낫다. 이게 말로만 듣던 썩고 병든 자본주의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북한에서도 이젠 애완견을 키우는 집이 있다지만, 대부분 기둥에 묶어놓는 데다 ‘시라지(시래기)’와 남은 음식을 넣고 끓여서 밥을 주는 게 전부이기 때문. 남한에 애완동물 병원이 있다는 것도 놀라웠는데, 북한에는 가축방역소 외에 동물병원은 본 적이 없는 것 같다고 했다.
정연 씨는 심지어 ‘남한에서 걸어 다니는 것들은 다 돈을 내야 한다’는 말도 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야 했을 때도 먼저 돈을 손에 쥐고 말을 걸었다.
“집을 배정받고 처음 밖으로 나왔는데 길을 잃어버린 거예요. 길을 물어보면 돈을 내야 한다는 생각에, 얼마를 달라고 할지 몰라서 일단 만 원을 손에 쥐고 물어봤죠. 그런데 그분은 친절하게 길을 대주면서(알려주면서) 다행히 돈을 달라고 안 하시더라고요.”
조금은 과묵해 보이는 강호 씨와 엉뚱 발랄한 정연 씨. 이 둘은 어떻게 연인 사이가 됐는지, 남한사람을 이성으로 사귈 수도 있었을 텐데 왜 탈북민끼리 사귀게 된 건지 물어봤다.
“한국 여자는 약간 드세다는 생각이 없진 않아요. 싫다는 건 아니고요. 북한말로 ‘까치는 까치끼리, 제비는 제비끼리 만나서 산다’는 속담이 있어요. 서로를 잘 이해해주는 사람들끼리 만나서 사는 게 좋다는 뜻이겠지요.”
정연 씨는 남녀 연애에도 남북 간 차이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남한은 법이 세서 그런지, 아니면 남자가 유순해서 그런지 ‘너 나랑 사귀지 않으면 집에 안 보낸다’는 식으로 겁주는 경우는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여동생이 남한 남자랑 사귀다 헤어졌는데 연락하지 말랬다고 진짜 연락을 안 하는 거예요. ‘그 사람 머저리 아니야?’라고 물었더니 동생은 제가 이상한 거래요.”
이 말을 들은 강호 씨는 북한 남자들의 경우 ‘열 번’이 아니라 ‘백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말을 구호처럼 쓴다고 했다. 여자가 싫다고 해도 될 때까지 해보는 게 ‘남자답다’, ‘남자의 기질이 있다’는 인식이 있어서 강하게 나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이야기를 좀 더 깊이 듣고 나니 제비든 까치든, 남이든 북이든 중요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경지역 장교였던 강호 씨는 정연 씨가 북한을 탈출하다 잡혀 왔을 때, 그리고 또 탈출하다 다시 잡혀 왔을 때 여러 번 도와줬고 결국 남한까지 함께 와 준 생명의 은인. 정연 씨는 거멓게 그을린 그의 얼굴을 마주보고 웃으며 말했다.
“교화소(교도소)에서 오랫동안 살았고 위험한 고비도 많았지만 (강호 씨) 덕분에 몸 어디 한 군데 어긋나지 않고 무사했던 것 같아요. 살아있는 것만도 고맙죠. 사실 북한에서 조용히 살려면 호미지고 산에 가서 깍지질(곡괭이질)을 하거나 시장에서 국수를 팔면 된다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차근차근 해 나가야죠. 다시 북한에 갈 건 아니니까요.”
<글. 기자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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