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행복한통일 : 대학에 입학한 지 한 달여 밖에 안됐는데, 대학생활 어떤가요?
일룡 : 학교 중앙광장 잔디밭에 앉아 친구들과 이야기도 해보고, 새내기배움터나 엠티도 다녀오고 나니 ‘진짜 대학생’이 됐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기저기 사랑이 싹트는 친구들도 있고요. 꽃이 필 때 벌둥지를 보면 뭔가 되게 분주하면서도 활기차잖아요. 그런 느낌이에요. 수업방식이나 과제 수준도 고등학교와 차이가 있고 영어 토론수업까지 있어서 쉽진 않지만, 제 인생에서 한 번쯤은 무언가에 몰두해봤다고 자부할 정도로 학구열을 불태우고 싶어 마음이 두근거려요(웃음).
찬양 : 방송에 나갔다는 이유만으로 연예인도 아닌데 주목받는 게 싫어 조용히 다니고 있는데, 학과 친구들도 배려를 잘 해줘서 ‘언니 동생’ 사이로 평범하게 지내요. 사실 같은 학교, 같은 학과에 두 번이나 낙방한 데다 동생까지 이 학교에 지원한다고 하기에, 동생만이라도 합격했으면 좋겠다고 바랐는데 저도 다닐 수 있게 돼 겹경사라고 생각해요.
e-행복한통일 : 탈북민을 위한 입시전형이 있긴 하지만, 공부도 잘 해야 입학할 수 있다고 들었어요.
일룡 : 잘 한다기 보다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특히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12시까지 공부를 하고 온 날도 많았고, 하루에 3~4시간 밖에 못 잔 것 같아요. 슬럼프에 빠질 때마다 담임선생님들께서 잘 이끌어주셨고 모르는 문제들은 그때그때 친구들에 물어보곤 했는데, 친구들이 잘 가르쳐줘서 좋았어요. 이제 대학이라는 새로운 곳에 왔고 아직 한참 부족하다는 걸 실감하지만 그래도 그 벽을 넘기 위해 힘차게 도전해보고 싶어요.
찬양 : 북한 중학교 학력을 남한에서 인정받긴 했지만, 무작정 대학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먼저 세상을 좀 더 알고 싶었어요. 외국에 나가보는 게 꿈이었죠. 아르바이트도 하고 후원도 받아서 필리핀으로 어학연수를 다녀왔고, 탈북 할 때 거쳐 왔던 제3국들을 가봤어요. 남한여권을 가진 자유인의 신분으로요. 그러다 한국 내 정식 교육기관을 졸업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방송을 출연하며 입시 준비를 같이 했어요. 탈북민전형이라도 학업이 우수한 학생들을 먼저 선발하니까 결국 삼수 끝에 입학하게 됐네요(웃음).
e-행복한통일 : 다섯 명의 가족 중 주찬양 씨가 가장 늦게 한국에 왔죠?
찬양 : 예. 아버지는 대북 라디오방송을 들으면서 우리가 속고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되셨어요. 자식들이 자유로운 환경에서 교육받길 원했기에, 탈북을 결심하시고 먼저 남한으로 가신 뒤 이어 가족을 탈출시켰죠. 하지만 저는 엄마와 동생들이 의심을 받지 않도록 자진해서 북한에 남았어요. 부모님은 혼자인 제게 돈이나 물품을 몰래 보내오셨고, 3년 넘게 혼자 지내다가 2010년 남한에 올 수 있었어요.
e-행복한통일 : 가족과 재회했을 때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라고...
찬양 : 남한으로 가신 아빠가 라디오에 출연할 때마다 북한에서 아빠 목소리를 듣고 울었던 기억이 나요. ‘우리가 살아서 만날 수 있을까’ 생각했죠. 그러다 남한에서 가족을 만난 날 밤, 3년 만에 엄마가 직접 만든 요리를 한상 가득 차려놓고 온 가족이 모여 축하하는 모습을 남동생이 촬영하는데, 완전히 신세계 같았어요. 하지만 다음날 잠을 자고 일어났을 땐 눈을 뜨지 못하겠더라고요. 꿈일까 봐,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는데 딱딱딱- 엄마가 부엌에서 내시는 도마소리, 아빠가 뉴스를 보면서 우렁우렁하시는 소리, 남동생과 여동생이 함께 속닥속닥 하는 소리가 들렸어요. 그 소리들이 점차 선명해졌을 때 아 이건 꿈이 아니구나, 정말 감사하다, 행복하단 생각이 들더라고요.
일룡 : 저는 인상 깊었던 기억을 이야기하고 싶어요. 사실 고등학교에 입학 때까지도 ‘북한사람인 나를 이상하게 보지 않을까? 혹시 놀리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라며 경계를 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던 어느 날 발표시간에 장래 희망과 함께 북한에서 살았던 이야기를 했더니, 친구들이 제 이야기에 공감하며 다 같이 울어주는 거예요. ‘아, 선입견은 내가 갖고 있구나’라는 걸 깨달았어요. 대학에 와서도 그래요. 자연스럽게 대하려고 노력하면서도 응원하고 지지해주는 친구들의 마음이 고마워요.
e-행복한통일 : 주찬양, 주일룡 두 학생이 남한에서 갖게 된 꿈은 뭔가요?
일룡 : 제가 북한에 있었다면 출신성분 때문에 잘해도 농사, 못해도 농사를 지었을 거예요. 아버지가 남한으로 오신 이유 중 하나가 교육인데, 이제 대학생이 되었으니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을 졸업한 후 로스쿨에 진학해 인권변호사가 되고 싶어요.
찬양 : 제가 북한에 있을 때 미디어를 통해서 외부의 정보를 접하고 인식을 바꾸었듯, 미디어는 매우 커다란 힘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TV 매체에 출연해 이야기를 하거나 국제 행사에서 발언을 하면 그 영향력이 눈에 띄게 늘어난다는 것을 경험하고부터는 ‘미디어 전문가’가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그래서 방송을 통해 북한의 변화, 북한 사람들의 잠재력과 가능성 등을 계속 전하고 싶어요.
e-행복한통일 : ‘이만갑’ 등 방송활동과 미국 북한인권단체 LiNK에서의 활동경험을 이야기해주세요.
찬양 : 탈북민들이 북한에 대해 잘 알거라고 생각하시겠지만, 자기 지역 외엔 몰라요. 그런데 이만갑을 녹화하면서 다른 탈북민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많은 걸 배웠어요. 세상 고생은 제가 다 한 것 같았는데 아니란 걸 알았고요. 지난 4년간 탈북민들과 네트워크를 다지고 배웠더니 마치 ‘북한’이라는 대학을 졸업한 느낌이에요. LiNK 서울지부에선 탈북민 최초로 인턴활동을 했는데, 북한 주민을 무조건 측은하게 보지 않고 잠재력을 지닌 사람, 미래에 희망이 될 사람이라는 자신감과 믿음을 줬어요. 고향 친구들에게 이런 사람들이 있다는 걸 전하고 싶고, 현재 LiNK 회원은 아니지만 계속 협력하고 있어요.
찬양 : 저는 이산의 아픔을 3년 겪었지만 70년 간 가족에 대한 그리움으로 만성적인 고통을 겪으신 분들이 많은데도, 우리 세대의 아픔이 아니라고 외면하고 있는 것 같아요. 비록 남북관계가 좋진 않지만 그 속에서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고 생각해요. 지금 북한 청년들은 아직 표출하지 않았을 뿐, 열려 있고 깨어 있어요. 저도 남한에서보다 북한에서 한국드라마를 더 많이 봤을 정도로 외부 매체와 접촉이 생각보다 많아요. 독일 통일 때도 중요한 게 정보였잖아요.
‘통일의 불’을 켤 수 있는 스위치들이 엄청나게 많다고 생각해요.
일룡 : 평양에서부터 시골 농사꾼의 아들까지 북한인구 800명 당 1명이 한국에 왔으니 마을별로 1명 이상 온 거나 다름없어요. 남한 친구들이 저에게 해준 것처럼 다른 탈북민 친구들에게도 선입견 없이 도와준다면 1차로 통일은 된 거라고 생각해요. 통일이 되면 하고 싶은 게 많은데 아무래도 남북한 주민 간 가교가 필요할 것 같아요. 그 다리역할을 하는 게 제 목표입니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할게요.
<글.사진 / 기자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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