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똑! 똑똑똑!
작년 이맘 때, 부산 바닷가와 인접한 한 동네에 탈북청소년대안학교가 들어선다는 소식을 듣고 강서구협의회 자문위원들은 개교하기도 전에 수차례 학교를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 학교에선 외부인과 탈북학생들의 접촉을 조심스러워했지만 학교관계자들을 설득했고, 작년 5월 강서구를 비롯한 부산지역 자문위원들과 장대현학교 학생들은 어깨동무하기 멘토링을 시작하게 됐다. 강서구협의회에서는 이경수, 문미순, 김연행 멘토자문위원이 은총이, 가희, 자룡이(이상 가명)와 각각 팀을 이뤘다. 처음엔 멘토 3명으로 시작했지만 김성곤 협의회장과 최종렬 간사가 적극적인 지원에 나섰고, 지금은 강서구 전 자문위원들이 장대현학교 학생들의 멘토링을 함께 하고있다.
결연식 직후, 의욕은 높았지만 탈북청소년들을 위해 무엇을 해주면 좋을지 고민이 됐다. 북한이라는 낯선 땅에서 15~17년간 자랐고, 사춘기를 겪고 있었으며, 기숙사 생활을 하는 데다 주말엔 부모님과 함께이거나 교회에 가야 했기 때문에 한 달에 한 번 정도밖에 만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장대현학교 측에서도 남한에 온 지 불과 몇 개월 밖에 되지 않은 아이들도 있어 1대1 만남을 다소 우려섞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강서구협의회의는 멘토-멘티간 안정적이고 정기적인 만남을 갖기 위해 매달 셋째주 토요일마다 ‘어깨동무하기 토요동아리’를 만들어 추진했다. 아이들의 선호도를 고려해 놀이공원이나 경마공원에 다녀오기도 하고 다양한 문화 체험들을 하면서, 아이들은 멘토자문위원에게 친밀감을 느꼈고 자문위원들은 아이들을 더 많이 이해할 수 있었다.
“식당에서 쇠고기나 떡갈비처럼 좋은 음식을 사줘도 잘 안 먹던 아이들이 5천~6천 원하는 밀면을 먹어보고는 너무 맛있어 하는 거예요. 밀면이 북한음식과 비슷해서 그런지 음식을 맛본 순간 한참 생각에 잠기더라고요. 아마 고향에 대한 향수를 느낀 것 같아요.”
거제도로 멘토링여름방학캠프를 갔을 때는 서먹서먹한 마음의 벽을 완전히 허물수 있었다. 특히 멘토가 낱말카드를 보고 말이나 몸짓으로 설명을 하면 멘티가 맞추는 게임을 했는데 그 과정에서 언어적, 문화적 격차를 좁히기도 했고 나중에는 팀간에 경쟁심이 붙어 서로 이기려고 열을 올리는 바람에 많이들 웃었던 기억이 오래도록 남는다고 했다. 또 6~7월에는 아이들과 함께 일일 어린이집교사체험을 2회 했는데, 학생들은 영유아들을 돌보면서, 스스로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보람을 느끼기도 했다.
매달 열리는 ‘토요동아리’는 대부분 학교학생 전체를 대상으로 했지만, 멘토자문위원들은 여행, 대화, 진로탐색 등을 통해 자신의 멘티와 더욱 가까워져 있었다. 이경수 멘토자문위원의 멘티는 (당시) 남한에 온지 6개월된 은총이였다. 은총이는 혼자 먼저 남한으로 내려왔고 아직도 북한에 가족이 남아있다. 똑똑하고 현명하지만 너무 일찍 철이 들어서인지 아이답지 않게 주위를 너무 의식하는 모습이 있었는데, 1년새 많은 변화가 생겼다.
“지금은 막 뛰어와서 저에게 어린아이처럼 안겨요. 그러나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달라질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아요. 천천히 적응해 나가겠지요. 습자지 위에 물이 서서히 스며드는 것처럼요.”
은총이는 한국문화도 잘 모르고 낯설었는데 멘토선생님과 여행도 가고 식사도 하면서 많은 걸 배웠다고 말한다. 특히 외래어가 많이 섞인 남한의 언어를 익히는 데 도움이 됐다고. ‘한국에서는 뭐든 열심히만 하면 되는 나라라고 말씀하셨던 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는 은총이는 작년 가을, 독학으로 검정고시를 준비한 지 한 달 반 만에 합격했다. 장래 꿈은 변호사라고 했다.
“북한에서는 인민재판을 받을 때 변호해주는 사람이 없어요. 저는 인권변호사가 돼서 한국에 와 있는 북한이탈주민들도 도와주고 북한인권 관련 단체에서도 일하고 싶어요.”
이경수 자문위원은 비록 쉽진 않겠지만 꿈이 확실하고 의지가 강한 은총이의 노력을 가능한 뒷받침해주고 싶다고 말한다. 또한 탈북청소년 멘토링을 하면서 자문위원으로서 책임감과 자부심이 생겼고, 주위사람부터 탈북민에 대한 이질감을 없앨 수 있도록 노력해야 겠다고 생각했으며, 통일에 대한 막연한 관심이 좀 더 구체적으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또 다른 멘토링 팀은 25년여 교직생활을 했던 문미순 멘토자문위원과 멘티 가희다. 가희는 문 자문위원이 처음 만나는 탈북민이었다. 그녀는 “실감도 나지 않고 어색했지만, 6개월동안 열 번 가까이 만나면서 여행도 다녀오고 카톡도 자주 하다보니 마치 늦둥이 딸아이를 얻은 것처럼 좋다”고 했다.
가희와 문미순 멘토, 그리고 은총이와 이경수 멘토는 지난 여름방학 때 순천만생태공원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순천만 갔을 때 북한 생각이 났어요. 고향에도 그런 벌판이 있거든요. 순천은 북한에서 역사를 배울 때 들어서 알고 있었어요. 큰 사건이 난 곳이라 어수선 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깨끗한 관광지로 꾸며놓았을 줄 생각도 못했네요.”
가희가 문미순 멘토에 대해 가장 고맙게 생각하는 부분은 멘토링 시작 때부터 거의 빠지지 않고 와주신 것이라고 한다. 일정이 바빠 참가하지 못하시는 분들도 있는데, 매번 찾아오셔서 ‘진짜 가족’처럼 대해주시는 점이 좋다고 했다.
“이건 제 친구 이야긴데, 저희 멘토선생님들은 자주 오시지만 친구는 멘토선생님이 안 오시니까 그때마다 펑펑 울었어요. 옆에서 보는 저도 눈물이 날 정도로요.”
친구 생각에 가희의 눈가가 붉어졌다. 이렇게 인정 많은 가희의 꿈은 간호사다. 손도 못쓰고 속수무책으로 가족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기 때문이다. 가희는 북한에 있을 때 할머니와 아버지가 치료도 받지 못하고 돌아가셨다며 “돈도 없고 갑자기 응급상황이 발생했을 때 가족 중 한 명이라도 의학지식이 있었더라면 살릴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에, 북한에 있을 때부터 간호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문미순 멘토자문위원은 올해 바닷가에서 찬란한 일출을 보면서 가희가 남한사회에 잘 적응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빌었다고 한다. 그녀는 가희가 남한으로 온 것이 ‘내 생에 최고로 잘 한 선택이었다’는 마음을 갖고 살 수 있도록, 건강하게 잘 보살펴주겠다고 약속했다.
행복해 하는 가희와 은총이를 보면 가끔 마음이 무거워지는 사람은 김연행 멘토자문위원이다. 멘토링을 해왔던 자룡이가 학교를 그만두고 강원도로 가버렸기 때문. 자룡이는 엄마와 둘이 남한으로 내려왔는데 형을 데리고 오기 위해서는 브로커비용이 필요했고 돈을 마련하기 위해 공부를 접고 일을 택했다. 멘토-멘티 결연식날 자룡이는 요리사의 꿈을 꾸고 있었지만, 2~3번의 만남 이후에는 자동차 기술을 배워 돈 잘 버는 직장을 갖고 싶다고 했다.
“인근 자동차회사에 아는 사람이 있어 견학을 시켜주고 싶었는데 이미 그만뒀다고 하더라고요. 찾아보면 낮에는 공부를 하고 야간에 일할 수 있는 곳이 있었을 텐데 안타까워요.”
김연행 자문위원은 자룡이 대신 장대현학교 아이들을 다 같이 멘토링하는 데 참여하고 있다. 그녀는 “탈북민 학생들에게 공부라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상일 수는 없다는 현실을 깨달았다”다고 말했다.
한편, 멘토링활동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고 있는 김성곤 협의회장은 “초기만 해도 학교에선 외부인과 탈북학생들의 접촉을 조심스러워했지만 멘토링을 통해 꾸준한 만남을 지속한 결과, 학생들이 먼저 마음의 문을 열었다”고 말했다. 최종렬 간사도 올해 탈북학생들이 남한 문화와 환경에 서서히 잘 스며들 수 있는 사업들을 추진하겠다고 약속했다.
멘토자문위원들은 자문위원이면서도 북한주민들의 실상에 대해 너무 모르는 게 많았는데 멘토교육과 멘토링 활동을 통해 조금씩 깨닫게 됐다며, 대한민국의 보통 어머니, 아버지들도 탈북민에 대해 더 많이 알고 따뜻한 시선으로 이들을 감싸줄 수 있어야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가운데 통일을 이룰 수 있을 것 같다고 전했다.
<글/사진. 기자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