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라는 시구(詩句)처럼 청소년기 아이들은 누구나 성장통을 겪는다. 그동안 살아왔던 터전을 떠나 남한에 어렵게 뿌리내린 탈북청소년들은 아마 훨씬 더 힘든 시간의 터널을 건너고 있을 것 같다. 이 아이들의 손을 붙잡아줄 민주평통 멘토 자문위원들의 열정이 그래서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이번호에서는 멘티 개개인의 연령, 가정환경, 특성, 진로에 맞게 활발한 멘토링을 펼치고 있는 멘토 자문위원 6명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이신호(가명) 학생은 북한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3년 전 엄마와 함께 남한에 정착한 초등학교 1학년 남학생이다. ADHD(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 증상이 있어 산만한데다, 기초학력이 부족해 학령을 1년 낮춰서 입학해야 했지만, 든든한 아빠, 삼촌 같은 멘토선생님을 만난 이후로 부쩍 자신감을 갖게 됐다.
신호는 북한에서 온 지 얼마 안 된데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1년 늦게 학교에 진학해야 했기 때문에 더 신경을 많이 쓰게 된 것 같습니다. 산만하고 덜렁대던 신호의 학교생활이 걱정돼 바로 담임선생님을 찾아가봤는데 한글 받아쓰기를 제대로 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그 이유가 안경 때문이라는 말을 듣고, 안경원에 데리고 가서 안경부터 바꿔줬습니다. 또 혹여 북한에서 왔다고 따돌림을 당하지 않을까 싶어 반 아이들에게 간식도 몇 번 돌렸고, 얼마 전 생일 때도 아이스크림과 과자를 사서 친구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신호 엄마도 아직 우리나라 실정을 잘 모르다보니 가정방문을 통해 신호 학교 준비물 챙기기, 장보기, 변기 뚫기와 같이 사소한 것들도 일일이 알려줬어요.
지난 여름방학 때 어깨동무 멘토링캠프에 다녀왔는데 같이 노래나 게임, 통일글짓기도 했고 북한이탈주민 부모들과 저녁에 어울려 맥주 한 잔씩 하며 허심탄회하게 대화도 나눴어요. 또 다음날 가족들과 함께 물놀이도 하는 등 캠프 프로그램이 아주 좋았습니다. 얼마 전 추석 명절 때는 시장에 데려가서 함께 호떡도 먹고 추석에 입을 새 옷도 장만해줬습니다.
사실 사업을 하면서 멘토링을 지속하기가 쉽지는 않아요. 바쁘면 그냥 지나치게 될까봐 달력에 표시해두고 많게는 월 3회, 평균 2회 정도 만나고 있어요. 전화통화는 더 자주 하는 편이구요. 바빠서 한동안 보지 못했을 때는 “삼촌 본 지 오래됐다”고 말해요. 저를 기다렸던 거지요.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신호 아버지의 빈 공백을 조금이나마 채워주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멘토링을 시작할 때 선입견을 갖지 않고 마음을 여니까 서로 빨리 가까워진 것 같습니다. 내가 멘티와 그 가족을 위해 꼭 무언가를 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면 멘토링이 원활치 못한 것 같아요. 좋은 것, 맛있는 것을 보면 멘티에게 주고 싶은 마음으로, 그렇게 대하고 있어요. 신호가 그러더라고요. “저는 삼촌을 만나서 운이 너무 좋아요”라고요.
신호를 처음 만났을 때 활달한 아이인줄로만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까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가 있었어요. 지금은 많이 차분해졌습니다. 운동을 좋아한다고 해서 사촌형과 신호 두 명에게 태권도 학원비를 지원해줬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좋아하는 놀이, 음식 등 자기 눈높이에 맞춰서 같이 놀아주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여행, 체험 등 프로그램만 계속하는 것은 오히려 아이들에게 스트레스를 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자주 만나고 안아주는 것이 최선 아닐까요?
여름캠프에 가서 글짓기를 했는데 신호가 북한에 있는 친구들을 그리워하고 걱정하는 편지를 쓴 것을 보고 굉장히 감동을 받았어요. ‘아, 이 아이들도 우리와 같구나, 조금만 더 관심을 가져주면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했지요. 앞으로도 저희 멘토들이 삼촌역할을 하면서 신호가 사회인이 될 때까지 계속 돌봐주려고 합니다.
멘토링을 하기에 앞서 북한이탈주민에 대한 편견을 버려야 해요. 알고 보면 우리 남한사람들이 그렇게 만든 거예요. 일회성 행사를 열고 선물주고, 식사 대접해드리고, 늘 그렇게 해왔으니까 그분들도 그렇게 생각하시는 겁니다. 민주평통 청년위원들이 이들의 상처를 잘 보듬고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서 다음 통일세대로서 역할을 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해요.
앞이 보이지 않지만, 늘 환한 밝은 미소를 가진 선화(가명). 선화는 태어난 지 7개월 때 시각장애를 갖게 됐다. 사촌 외에는 친구가 없었던 19살 선화에게 올해 언니와 이웃아저씨, 이웃아줌마가 생겼다. 멘토들은 밴드를 활용해 서로의 경험을 공유하며, 사회복지사를 목표로 하는 선화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민주평통 2030청년위원이 되었지만 학생신분이다보니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는데, 청년위원장님 권유로 선화의 멘토를 하게 됐습니다. 평소 분식집이나 카페 등에서 만나는 게 전부지만, 선화도 저도 멘토링시간이 즐겁습니다. 시각장애가 있다 보니 되도록 다정하게 말을 걸려고 노력했고, 선화의 연령대에 관심을 가질만한 주제로 대화를 나누며 친해질 수 있었어요. 처음에는 주로 제가 이야기를 했어요. 그땐 하고 싶은 게 뭔지 물어봐도 ‘다 좋다, 딱히 없다’고 대답했는데, 지금은 본인이 저와 함께 하고 싶은 것들을 이야기합니다.
선화는 사회복지사가 되어 어려운 환경에 있는 분들을 돕고 싶다고 해요. 그래서 만날 때마다 대학진학에 대한 상담을 많이 했어요. 선화가 가고 싶은 대학에 전화해서 기숙사 등록금, 그리고 선화 같이 특수한 학생들이 다니기에 불편하진 않는지 알아봐주고 면접 코칭도 했어요. 현재 2개 학교에 지원했고 발표를 기다리고 있고요.
여름방학 캠프에서 선화 어머니가 고향 친척들을 그리워하시는 모습을 보고 안타까웠어요. 선화는 통일 돼서 북한학생들이 오면 자신은 먼저 와서 살았으니까 그 친구들이 남한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알려주고 싶다고 해요. 저도 나이가 20대 후반이고, 나중에 어떤 일을 하게될 지 모르지만 선화와 계속 유대감을 갖고 연락하며 지내려고 합니다. 나중에 복지시설같은 곳에서 자원봉사도 같이 하자고 선화와 가끔 이야기 했었어요.
선화가 앞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처음에는 선화의 어머님이 보호자로 같이 참여하셨지만 멘토링이 진행될수록 신뢰가 쌓여서 요즘에는 어머님이 참석을 안 하십니다. 선화는 저를 친한 이웃아저씨, ‘송정아저씨’라고 불러요. 선화가 많이 외로울 것 같다는 생각에 주로 친밀감을 쌓기 위해 노력했고, 카톡 등 문자를 자주 주고 받고 있습니다. 이번에 여름방학 캠프할 때 천연염색, 족욕체험, 탈북 선배와의 만남의 시간, 멘토-멘티 통일이야기 등의 시간을 가졌는데, 여기서 함께 공감을 나눌 수 있는 친구도 만났습니다.
올해 대학생 위주로 멘토단을 구성했고, 현재 멘토 50명, 멘티 12명 등 12개 조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탈북청소년들과 비슷한 세대간에 교감을 나누기 좋을 것 같아 2030청년자문위원, 통일동아리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진행했고 다른 일반 자문위원님들은 경제적인 측면에서의 지원, 취업지원 등에 포커스를 맞추도록 했습니다. 내년에는 자문위원은 물론이고, 통일동아리 대학생들까지 자원봉사자로 포함한 ‘통일전문 멘토 네트워크’를 구축해서 체계적으로 진행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 선화가 전문 사회복지사가 되어서 나중에 다른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립할 수 있는 여건이 될 수 있도록 어깨동무하기사업이 끝난 뒤에라도 계속 멘토가 되어줄 계획입니다.
저는 아무래도 나이가 있다보니 강혜진 김석곤 멘토가 주로 멘토링을 하고 그 두명을 뒤에서 돕는 보조역할을 합니다. 선화 어머니께서 긍정적이고 적극적이어서 편하고 자주 만나다보니 이제 친근한 느낌이 듭니다. 한옥마을에서 부채만들기, 비빔밥만들기 체험을 같이 했는데 선화가 좋아하고 잘하더라고요. 탈북청소년들이 우리사회에 잘 적응하고 행복해져야 북한에도 좋은 소문이 들리지 않겠어요? 우리가 멘토링을 잘 이끌어나가면 통일이 앞당겨질 거라고 생각해요.
일선 학교에서 오랫동안 학생들을 지도하다 교장으로 정년퇴임한 한현식 멘토는 청소년 멘토링 전문가다. 학교 교사들이 멘토가 되어 한 아이만 책임져도 청소년들의 일탈문제는 없어질 거라고 믿는다. 멘티 김강민(가명) 학생은 아버지와 함께 남한으로 건너와 현재 여명학교에 재학 중이며 서강대, 동국대 등에 합격했다.
강민이를 만난 지 10개월여가 됐습니다. 멘토란 친구, 안내자, 부모, 선생님 등 여러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하지만 멘토링 기간동안 삼촌, 이모 등의 호칭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멘토-멘티 간 서로 지켜야 할 것들도 있고요. 하지만 12월에 멘토 해단식을 하고 강민이가 대학생이 되면, 멘토-멘티 관계가 아니라 삼촌, 아버지와 같은 가족관계로 다시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아들이에요? 진짜 닮았네요”라고 누가 말하면 기분은 좋더라고요.
남북한 수업과정이 달라 적응하기 힘들었을 텐데 강민이는 이를 잘 극복하고 자신이 원하는 진로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진로를 결정할 때 저는 전문적인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이과를 권유했지만 강민이는 통일에 관한 일을 하고 싶어 해요. 지난 7월에는 청소년통일모의국무회의 발표대회에서 대상을 받기도 했답니다.
평소 멘티에게 인성교육과 함께 지혜를 익히고, 사람들과의 관계맺음을 잘해야 하며, 전문성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쳤어요. 음악회에 가거나 영화도 보고 독서도 하며 이야기를 나눴고요. 철민이는 지난 여름캠프 때 “함께 밥을 먹고, 강의도 듣고, 초컬릿도 만들어보고 멘토선생님과 한방에서 잠을 자면서 아름다운 미래를 꿈꾸는 자체가 행복이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멘티가 약속을 잘 안 지키는 것에 대해 속상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아이들을 끝까지 기다려줘야 합니다. 처음엔 저도 2시간 넘게 약속장소에서 기다렸던 적이 있습니다. 멘티에게 약속은 신뢰이자 세상을 사는 재산이고 지혜라고 알려주었더니 미안해 하며 많이 개선됐습니다. 멘토링을 하다보면 멘티만 성장하는 게 아니라 멘토도 많이 성장합니다. 저도 강민이를 통해 북한의 실상을 알고 탈북청소년들을 많이 이해할 수 있었어요.
<글. 기자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