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남단, 경상남도의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있는 하동군은 한국전쟁 당시 계속 밀리기만 하던 아군이 병력을 가다듬고 북한군의 남진을 막기 위해 심기일전 했던 전투지다. 한국군과 미군은 물론 혈기왕성했던 동네 청년과 홍안의 어린 학생들까지 분연히 일어나 총대를 쥐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절박함은 치열한 전투로 이어졌고 시신들을 수습할 곳이 마땅치 않아 도로 주변에 묻힌 이들도 부지기수였단다.

진주에서 하동방향으로 2번 국도를 타고 달리다 보면 멀리서도 한 눈에 들어오는 조형물이 있다. 바로 하동군 호국공원의 참전전우기념비다. 한국전쟁, 월남전 참전용사 등 호국영령의 넋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것으로, 특히 이 지역은 1950년 7월 27일, 한국군 일부와 미 29 독립연대 3대대가 진주를 향하던 북한군을 저지했던 격전지이기도 하다. 공원에는 당시 전투에서 전사한 채병덕 장군을 비롯해 한국군 100여 명과 미군 313명의 영혼을 기리고 국가안보에 대한 귀감을 삼기 위한 기념비와 장갑차, 해안포 등이 전시되어 있다.
잠시 발길을 멈춰, 그리 넓지 않은 공원 안을 찬찬히 둘러보자면 참전용사들의 이름 명패가 시야에 들어온다. 어디하나 특이할 것 없는, 오히려 어디선가 들어봤을 법한 친숙한 이름들을 읽어 내리자니 코끝이 찡해온다. 한 때는 누군가의 부모형제였을 이름들. 이제는 생기를 잃은 그 이름들이 한 없이 서럽고 안타까워서 절로 눈을 감게 된다.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잘 지키겠습니다.’

먹먹해진 심장을 안고 섬진강변으로 나서 본다. 물결 위로 부서진 햇살마저 끌어안고 잔잔히 흐르는 강물이 아릿해졌던 심장을 다독인다. 바라보기만 해도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섬진강의 풍광은 어디서 봐도 그 매력이 덜하진 않지만 300여 년 된 750그루의 노송과 섬진강물이 어우러져 한 폭의 동양화를 완성해내는 하동송림은 놓치기 아까운 명소다. 하동을 대표하는 관광지인 화개장터, 쌍계사, 소설 ‘토지’의 배경지 등으로 향하는 길목이며, 강물을 옆에 끼고 드라이브 코스로 유명한 19번 국도를 달리다 보면 쉽게 찾을 수 있다.

또 섬진강과 지리산, 하동의 풍요로운 들판을 한 눈에 보고 싶다면 인근의 하동공원을 추천한다. 낮에는 탁 트인 전망과 시원한 강바람을 즐기기에 좋고, 경관 조명등으로 밝혀진 야경 역시 볼만하다. 무엇보다 저 멀리 광양시까지 한 눈에 보이는 전망대와 조선 고종 7년(1870년)에 지어진 정자, 섬호정은 사시사철 아름다운 자연 풍경과의 조화가 빼어나 사진 촬영 장소로도 손꼽힌다. 또한 공원 한 쪽에는 하동출신 호국영정 757위를 봉안한 하동군 충혼탑도 있으니 순국선열들의 희생을 되새기며 묵념의 시간을 가져보자.

물길을 끼고 달리다 만난 만추의 평사리 들녘은 부산한 길손들을 싫은 내색 하나 없이 넉넉한 품을 벌려 반긴다. 과연 만석지기 한 둘쯤은 너끈히 살았을법한 너른 들판을 지나 ‘서희’를 만나러 간다. 한국 대하소설의 백미로 일컬어지는 박경리의 소설 ‘토지’ 속 마을을 고스란히 재현해 낸 최참판댁이 이곳에 있다.

소설 ‘토지’는 구한말을 시작으로 일제강점기와 해방에 이르는 60여 년간의 한국 격변기를 만석지기 최참판댁, 마지막 당주 최치수와 딸 서희, 그리고 그 주변 인물들을 통해 담아낸 작품. 악양면의 최참판댁은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를 위해 만들어진 세트장으로 지
금도 드라마 ‘해를 품은 달’, ‘구가의서’, 영화 ‘관상’ 등이 이곳에서 촬영됐으며, 평소에는 관광지로 관리, 운영되고 있다.

까치밥을 남겨 둔 감나무, 덜컹거리며 움직이는 물레방아와 한 두포기 풀이 자란 초가지붕, 나직한 돌담, 좁은 흙길, 실제로도 소를 키우는 외양간 등, 어디선가 문이 열리고 소설 속의 등장인물이 ‘뉘시오’라고 말을 건네도 하나 놀랍지 않을 것 같은 마을을 지나 주인공 서희네 집으로 향한다. 솟을대문을 중심으로 행랑채와 안채, 별당, 사랑채 등 옛 조선 반가의 전형적인 양식을 살린 한옥은 아직도 그 시절 만석지기의 위엄을 대변하는 듯 보인다. 특히 바깥주인이 기거하던 사랑채의 높은 누각에 오르면 너른 들판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그리고 불과 얼마 전 황금빛 알알이 여문 곡식들을 거둬들인 빈 들녘 한 가운데에는 그 유명한 부부송이 서 있다. 또한 소설 속 대미를 장식하는 장소인 별당 역시 연못과 아담한 전각의 어우러짐이 멋스러워 오래 쉬어가게 되는 곳이다. ‘토지’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다면 최참판댁 뒤쪽으로 관람로를 따라 올라보자. 울창한 대숲을 지나 평사리문학관이 자리하고 있으니 함께 둘러볼 만하다.
볼 것은 많고 늦가을 해는 짧으니 자연스레 마음이 급해진다. 경상도와 전라도를 잇던 소통의 장이자 풍물장터로 오랜 세월 각광받아 온 화개장터에는 지리산이 내어 준 온갖 약초들이 빼꼼히 자리하고 있다. 장터 뒤쪽을 유유자적 흐르는 강가에는 흐드러진 갈대가 늦가을의 여유를 더한다. 장터를 지나 쌍계사로 향하는 길목에서 만나는 십리벚꽃길은 이 계절에도 푸릇함을 잃지 않아 하동 지역 곳곳의 차밭과는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가을날의 풍경이 일품인 쌍계사는 신라 성덕왕 21년에 세워진 사찰로 일주문을 지나 금강문, 천왕문, 팔영루, 대영루, 삼성각 등의 건물들이 거의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으며, 하나같이 화려하고 웅장한 자태를 자랑한다. 무엇보다 아름다운 것은 사찰을 둘러싼 자연경관이다. 흐르는 물소리가 목탁소리에 지지 않을 만큼 명쾌하게 산중을 울리고, 늘씬하게 뻗어 오른 나무들 중에는 고운 하늘빛을 닮고 싶어 채 가을 옷으로 갈아입지 못한 것들도 여럿이지만 그 모습 역시 아름답긴 매한가지다.

하동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맛이라면 역시 차(茶)다. 일일이 수작업으로 만들어지는 하동의 차는 그 색이 진하고 맛이 부드러운 것이 특징. 우리나라 차시배지답게 여행하다 보면 곳곳에서 그림 같은 차밭을 만날 수 있다. 어딜 가나 차 인심이 후한편이지만 간단히 다도를 경험하고 싶다면 쌍계사 아래쪽의 차문화센터를 이용하면 쉽다.

또 차와 함께 빼놓을 수 없는 먹거리라면 재첩과 참게를 들 수 있는데, 그중에서도 섬진강 맑은 물에서 건진 재첩은 일명 보약조개로 불릴 만큼 그 맛과 영양이 풍부하기로 유명하다. 잡아 올린 재첩은 해감을 시켜 흔히 국으로 끓여먹는데, 맑고 담백하게 끓여낸 국물 맛이 시원해, 특히 해장국으로 제격이다. 또 싱싱한 야채를 넉넉히 올려 매콤새콤하게 무쳐 낸 재첩무침 역시 제대로 밥도둑이다. 강변을 따라 달리다보면 쉽사리 제첩전문점을 만날 수 있고, 화개장터를 한 바퀴 돌아 본 뒤 인접한 식당을 찾아 들어가도 넉넉한 한 상을 받을 수 있다.

<글. 권혜리 / 사진. 나병필>
2013 Novemb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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