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통일 | 당신이 통일 주인공
“산을 함께 넘는 친구들이 있어 든든합니다”
11년차 사회복지사 전주영 씨
봉사활동이 찾아준 천직 ‘사회복지사’
주영 씨는 2007년 9월 이곳에 왔다. 집 근처 교회가 탈북민을 대상으로 하는 ‘자유시민대학’을 운영했는데 그곳에서 참여했던 장애인봉사활동이 지금의 인연을 만들어주었다. 당시 주영 씨는 저녁 8시부터 아침 8시까지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수화물을 나르는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낮에 인터넷을 검색하다 알게 된 단체였다.
자유시민대학에서는 생활에 필요한 실습들을 했다. 하나원에서는 한국 생활에 필요한 이론들을 배웠다면, 이곳에서는 직접 현장에 나가 부딪히는 연습을 했다. 그러다 자유시민대학에서 만난 학장이 한 장애인 복지재단에서 사람을 구한다며 면접을 권유했다.
“자유시민대학에서 1박2일로 봉사를 갔었는데 한 장애인 친구가 발가락에 펜을 끼고 시를 썼어요. 제목이 ‘나의 팔다리는 장식품인가’였는데 순간 마음이 ‘쾅’ 하더라고요. 그 친구는 장애인인데도 문단에 등단도 하고 사회복지 대학원을 다니고 있었거든요. 나는 팔다리가 멀쩡하니까 더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했고, 학장님이 복지재단을 소개해주셔서 바로 사회복지 공부를 시작했어요.”
▲ 교회 봉사활동에서 만난 장애우 친구들
▲ 장애우의 아침식사를 돕고 있는 전주영 씨
누군가의 손을 씻겨주면 제 손도 깨끗해집니다
며칠 뒤 주영 씨는 ‘합격’을 통보받았다. 우연히 시작한 봉사활동이 그의 천직을 찾아준 셈이다. 이에 주영 씨는 곧바로 서울사이버대학에 입학했고 2년 열공 끝에 ‘사회복지사 2급’ 자격을 얻었다. 북에서 다녔던 대학 학력이 인정된 덕분이었다.
졸업 후에는 북한대학원 대학교에서 북한학 석사과정을 마쳤다. 훗날 탈북민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사회복지와 연결할 수 있는 북한이탈주민전문상담사 3급과 심리상담사 1급 자격증을 함께 취득했다.
물론 그간의 세월이 마냥 즐겁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그도 ‘탈북민’이라는 편견과 소외감을 이겨내고자 애쓰고 노력했던 순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마다 자신을 ‘아빠’라 부르는 장애인들을 보면 그간의 괴로운 일들이 싹 잊혀질 만큼 고맙다고 한다.
“처음엔 사회복지사라는 직업에 충격을 받았어요. 북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거든요. 나보다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면서도 월급을 받을 수 있다는 게 신기하잖아요. 마치 제가 누군가의 손을 씻겨주면 제 손도 같이 깨끗해지는 것처럼요.”
▲ 전주영 씨
8년의 기숙사 생활로 마련한 ‘우리 집’
주영 씨는 이 일을 하면서 또 다른 재능을 발견했다. 바로 절약과 저축이다. 복지사가 되고 받은 첫 월급이 187만 원이었는데, 북한 돈으로 환산해보니 북에서 160년 이상을 일해야 모을 수 있는 돈이었다.
이에 주영 씨는 돈을 더 절약하겠다는 일념으로 아내와 살던 임대아파트를 정리했다. 매일 잠만 자러 가는 집에 월 15~20만 원을 내는 게 아까웠던 이유다. 그래서 주영 씨와 아내는 8년간 기숙사 생활을 하며 관리비, 난방비, 교통비 같은 지출들을 줄여나갔다.
덕분에 주영 씨는 얼마 전 ‘내 집 마련’에 성공했다. 힘들게 번 돈을 한푼 두푼 모으다 보니 근 십년 만에 그림 같은 집이 생긴 것이다.
“정년퇴직이 멀지 않았는데, 퇴직하고 나면 저희 집에 장애인 홈스테이를 만들어서 두세 분과 함께 살려고 해요. 물론 제약은 있겠지만 어려운 사람들은 많고 제가 조금만 노력하면 몇 분이라도 도울 수 있으니까요.”
▲ 봉사자들과 함께 짜장면을 만들고 있는 전주영 씨
주영 씨는 최근 자유시민대학 후배들에게 멘토가 돼주고 있다. 10년 전 자신에게 ‘사회복지사’라는 직업을 안내해준 김양원 목사님과 재단 이사장님, 학장님들처럼 따뜻한 조력자가 돼주고 싶은 까닭이다. 북한에서는 선택의 자유가 없었지만, 한국에서는 ‘자유’와 그에 따르는 ‘책임’도 있으니 충분한 고민과 경험이 필요한 이유다. 그래서 그는 “선택을 잘 하려면 욕심을 버리고 배움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주영 씨에게 사회복지사라는 직업은 ‘삶의 버팀목’이다. 자신은 그들의 손발이 돼주지만 그들은 주영 씨에게 일편단심 민들레 같은 친구가 돼주기 때문이다. 주영 씨와 친구들은 매일 서로를 응원하며 크고 작은 산들을 함께 넘고 있다.
<글, 사진_강문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