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통일 | 여행이 문화를 만나다
하늘을 비추는 강물 가을을 노니는 바람,
충북 단양
한 걸음 내딛으니 길이 뒤로 따라온다. 길은 뒤따라서도 오고 앞서 가기도 하며 길과 함께 걷다보면 발을 옮겨 놓을수록 마음이 한결 가벼워져 제법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가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운명에 온몸을 내맡기며 정처 없이 걸어가는 처지가 되어 남한강 푸른 물줄기를 따라 단양의 길을 걷는다. 어쩌면 단양의 진짜 명물은 ‘길’이 아닐까. 마침 메밀꽃이 흐붓하게 피어 이 땅에 가을이 왔음을, 이 대지에 천명하는 듯하다.
남한강 물길에서 노닐어 천하를 품다,
도담삼봉과 만천하 스카이 워크
‘단양팔경’이라 하여 단양에는 무려 여덟 가지의 이름난 경치가 있는데, 이곳은 그 중에서도 단연 첫 번째 경치다. 정도전이 자신의 호를 이곳의 지명을 빌려와 ‘삼봉’으로 지었을 정도로 사랑해마지 않았던 곳. ‘도담리에 솟은 세 개의 바위’라는 도담삼봉은 마치 뫼 산(山) 자를 연상하는 모습으로 가운데 바위가 유독 우뚝하다. 바다도 아닌 강에 우뚝 선 저것은 섬인가 산인가. 흡사 동해 바다를 지키는 독도와 같이 우뚝 서서 풍기는 기운이 예사롭지 않다.
짙푸른 남한강 물은 땅 위에 배를 대고 드러누운 거대한 용의 형상으로 흘러가다 문득 만학천봉에서 몸을 일으키고, 하늘로 고개를 쳐든다. 단양의 만학천봉은 만개의 골짜기와 천개의 봉우리 사이에 우뚝 솟은 바위다 관직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이 입는 도포를 닮았다하여 옷바위라고도 불렸다. 어변성룡(魚變成龍)이 실현되는 자리, 가히 용문(龍文)이라 할 만하다. 물고기가 용이 되어 비상을 시작하면 그 용의 등에 올라타고 세상을 내려다보는 일, 상상이 아니다.
▲ 만학천봉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남한강
남한강의 정경이 내려다보이는 만학천봉 꼭대기에 혼천의나 천문대 형상의 현대의 건축물이 서 있는데, ‘만천하 스카이워크’의 만학천봉 전망대다. 나무 데크와 나선형으로 상승하는 길을 따라 오르면 어느새 꼭대기에 도달하는데, 전망대 꼭대기에는 유리 바닥 아래로 천하를 내려다볼 수 있게 되어 있다. 만학천봉의 아래 절벽에는 포효하는 듯한 호랑이 문양이 있어 예로부터 신성시되었던 곳이라 하며 하나의 소원을 빌면 이루어준다고도 한다.
▲ 하늘 끝까지 오를 것 같은 만학천봉 전망대
▲ 유리 바닥 아래로 천하를 내려다보다
어두운 터널 끝에 빛의 문을 열다,
이끼터널과 수양개빛터널
단양에는 터널이 많다. 단양 읍내에서 3번국도를 따라 애곡마을 쪽으로 가다보면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좁은 터널들이 연이어 나온다. 예전의 철길 구간을 포장도로로 만들어 터널이 된 것인데 터널 앞에 신호등이 달려 있다. 맞은편에서 차가 진입하면 빨간 신호등으로 바뀌는 방식의 양방향 일방통행 길이다. 신호를 받은 차들이 터널을 차례로 건너기 위해 70초를 기다려야 한다. 만약 이 기다리는 잠시의 시간이 지루하다면, 우리는 이미 너무 빠른 세상에 길들여져 우리 본래의 속도를 잊은 지 오래라는 걸 자각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조금 더 천천히 마음의 속도를 늦춰본다.
터널을 지나면 낙석방지용 콘크리트벽이 양쪽으로 설치된 곳이 있는데, 여름 동안 이끼가 자라 ‘이끼터널’을 만들어낸다. 이끼 벽에 새겨진 이름들은 첫사랑과 같은 밀도로 마음 깊은 곳을 파고들어 강렬한 꿈을 꾸는 듯하다. 식물이 내뿜는 생기가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 인공과 자연이 만들어낸 단양의 명물 이끼터널
주변에는 구석기 유물을 발견한 장소를 박물관으로 꾸민 수양개선사유물전시관이 있다. 이곳 수양개의 구석기 유물 중에는 중학교 국사 교과서에 실린 ‘물고기 모양을 새긴 예술품’ 등의 귀중한 유적이 많아 역사 교육장으로 큰 가치와 의의를 지닌다. 전시관 뒤편으로 나가면 터널을 불빛으로 가득 채운 ‘수양개빛터널’이 있다. 문을 열어젖히니 불빛이 가득 차 있었다. 지금껏 우리가 마주치던 답답한 시멘트 냄새나는 터널은 여기에 없다. 이곳의 터널은 낯설고, 어쩐지 훨훨 날아가는 기분마저 든다. 터널의 끝에 환한 불빛이 새어 들어오는 문이 있었다. 저 문을 열면 무엇이 있을까, 기대하며 밖으로 나가니 결국 우리가 방금 서 있던 그 세상이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순간, 이 모든 순간이 천국이고 극락이 아니었을까. 터널의 끝에서 다시 마주하게 된 우리의 생이 반갑다.
▲ 터널 안에 빛을 담은 수양개빛터널
▲ 수양개선사유물전시관
우리 혼을 담은 우리 그릇의 맥을 잇다,
방곡도예촌
단양에서 59번 국도를 타고 경북 문경과 예천 쪽으로 가다보면 방곡도예촌이 나온다. 방곡도깨비마을로도 불리는 이곳은 600년 전부터 그릇을 만들기 시작해 지금도 밭에서는 돌보다 사금파리가 더 많이 나오는 장소로, 현재까지 우리 ‘사기그릇’의 명맥을 이어나가고 있다. 문득 마을 입구에서 만난 한 사람이 있었다. 정처 없이 이곳의 낯선 자취를 더듬어 온 손님에게 차 한 잔 대접하겠노라 하던 사람, 알고 보니 충북 무형문화재 10호이자 대한민국 명장인 ‘방곡도요’ 서동규 명장이었다. 염치 불구하고 가마 구경을 하겠다고 했더니, 명장은 선선히 자신의 가마터를 안내했다. 그렇게 우연히 만나 가볍게 차 한 잔 놓고 시작했던 담소가 자못 무게를 더해 나갔다.
▲ 소나무로만 불을 때는 전통 방식 가마
▲ 물과 흙으로만 빚어 나무로만 굽는 명인의 그릇
“도자기는 우리말이 아닙니다” 명인은 우리 그릇의 역사와 정신이 무엇인가를 되물었다. “도자기는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를 하면서 일본식으로 만든 말이고, 옛날부터 이어온 우리말은 ‘사기그릇’입니다”라며 우리의 혼을 담은 그릇이 일본으로 건너가 ‘이도다완(정호다완)’이 된 사연이 이어졌다. 작은 밥그릇 같기도 한 이 그릇은 흔히 ‘막사발’로 불리는데 임진왜란 때 끌려간 조선 도공에 의해 일본에 전해졌다. 한 치 오차도 없는 일본의 예술 속에서 유약이 흐르는 대로, 금이 가는 그대로 자유분방하게 만든 이 그릇은 뜻밖의 파격이 되어 대대로 일본인에게 찻사발로 사랑받는다. 자연과 인공의 솜씨를 절묘하게 배합한 이 그릇은 명인의 전시관에서 그 당당한 모습을 뽐내고 있었다. 일본에서 여러 번 전시회를 할 때도 명인은 우리 그릇의 정신을 지키기 어려운 국내 현실이 안타까웠다고 한다.
명인의 나이는 여든이다. 그는 그릇을 만든 지 60년을 한결같이 예술적인 고가의 그릇이 아니라 밥이나 국을 담을 수 있는 막그릇만 만들어왔다. 누구나 쓸 수 있는 생활도자기를 고집하고 흙과 나무와 물과 불로만 그릇을 만든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가 개발한 녹자는 청와대로 납품돼 식기로 사용될 정도로 품질을 인정받았다. 가마에서 소금도 굽는데, 천일염을 감싸 가마의 위쪽에서 구워내 ‘방곡도염’을 개발했다. 1300도 정도에서 15시간 이상 구워진 소금은 유해성분은 날아가고 맛이 부드러워진다.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끝없이 소중하게 ‘우리 것’을 지켜내는 그 마음이 아름다웠다.
▲ 서동규 명장과 나눈 따뜻한 차 한 잔
<글: 김혜진 / 사진: 김규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