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야구 프리미어리그12 우승이 화제다. 한국시리즈마저 끝나서 텅 빈 구장이 마냥 아쉬운 사람들에게 더없이 반가운 소식인데, 현우는 아무래도 낯선 야구경기보다는 축구나 탁구가 더 재미있단다.
“남한에 와서 우리 고향 사람(탈북민)에게 영어 배와주는(가르쳐주는) 학원에 다녔는데 금요일에 몇 시간씩 함께 여가활동을 하면서 탁구를 쳤어요.”
북한에서는 탁구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사설 탁구장을 이용하려면 시간당 50원 씩(2010년, 함경북도 도시 기준) 돈을 내야 했기 때문에 쉽게 접할 수 있는 운동은 아니었다. 물론 진짜 탁구대 대신 평평한 시멘트 위에 네트 대용품을 세워놓고 즐기기도 한다고.
현우는 3년 째 남북한 학생들이 모여서 축구를 하는 친목동호회 활동을 하고 있다.
“고향 친구들만 하는 게 아니라 한국 친구들과 같이 하니까 북한 사람 남한사람 벽이 없어지는 것 같아 좋아요. 남한 형들은 하나원에 대해서 잘 모르면서도 ‘너 하나원 몇 기야?’ 하면서 말을 걸거나 북한말을 따라 하기도 해요.”
혹시 서로 쓰는 축구 용어가 달라 경기를 하기에 불편한 점은 없는지 물었더니 ‘있다’고 했다.
“코너킥을 우리 고향에선 구석차기라고 하거든요. 나중에 축구 끝나고 한 남한 형이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더라고요. 그 다음부터 형들도 코너킥 대신 구석차기라는 말을 써요.(웃음)”
북한에는 축구동호회가 따로 있진 않다고 했다. ‘구락부’ 단위로 축구에 재능이 있는 아이들을 선발해 도 단위 팀으로 올려보내고 거기서도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면 국가대표로 훈련을 받는 시스템이라고 한다. 게다가 북한은 여러 사람이 모이는 것이 허용되지 않기 때문에 이런 동호회 활동이 쉽지 않다고 했다.
“만약 제가 남한에서 태어났다면 축구선수가 돼 있을 것 같아요. 배운 지 얼마 안돼서 축구기술은 좀 떨어져도 드리블만은 진짜 빠르거든요.”
현우는 남한에 온 지 얼마 안 돼 대안학교에 입학했고 그곳에서 자신과 비슷한 시기에 한국에 온 친구를 사귀게 됐다. 그는 친구와 처음 영화를 보러간 날, 영화표를 구입하다 당황했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남한에 온 지 세 달 정도 됐을 때인 것 같아요. 줄을 서서 표를 뽑고 순서를 기다려야 하는데 저는 몰랐거든요. 그냥 가서 표를 달라고 했더니 사람들이 막 눈총을 쏘더라고요(째려보더라고요). 왜 그러지? 하고 있었는데 안내원이 줄을 서야 한다고 알려주셨어요.”
티켓에 적힌 좌석을 찾아가는 일도 쉽지 않았다. 사방이 어두운데다 배열규칙을 몰랐기 때문이다.
영화관에 들어간 현우와 친구는 일단 큰 스크린에 압도됐고, 의자가 움직이거나 바람이 나오는 4D영화관 시스템이 매우 신기했다고 한다. 또한 북한에서는 중국이나 러시아 영화 밖에 볼 수 없었는데 그날은 미국 블록버스터 영화의 화려한 액션이 눈앞에 펼쳐져 더욱 흥미로왔다.
“물론 처음에는 주인공들 이름도 잘 모르겠고 내용 파악도 어려웠는데 그 다음부터는 미리 인터넷에서 예습을 해갔어요. 줄거리도 찾아도 보고 주인공에 대해서 사전조사도 해보고요.”
현우에게 그동안 본 영화 중 어떤 작품이 재미있었냐고 묻자 “한국 영화는 사랑이야기나 실제 생활 속 이야기를 들려주기 때문에 대부분 감명깊게 봤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 중에서도 차인표 주연의 크로싱이라는 영화를 감명 깊게 봤어요. 북한사람의 탈북과정과 중국체류, 한국 정착 등에 대한 내용을 담았는데, 진짜 제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울면서 봤던 것 기억이 나요.”
현우에게 북한은 그리움의 또 다른 이름이다. 어릴 적 엄마와 헤어진 후 이모 댁에서 자랐다가 남한에 정착한 엄마의 연락을 받고 탈북한 현우. 처음 휴대전화를 받았을 때 게임이나 동영상을 즐길 수 있다는 것보다는 북한으로 전화할 수 있다는 게 너무 좋았다고 한다.
“사실 엄마에 대한 그리움보다는 이모에 대한 그리움이 더 많았거든요. 전화를 드렸더니 이모는 제가 갑자기 사라져서 걱정을 많이 했는데 남한에 가 있다고 하니까 좋아하셨어요. 엄마랑 같이 있다고 하니까 마음도 놓이신다고요.”
스무살 무렵 북한을 떠난 현우는 북한에 예쁜 여자친구를 남겨두고 와야 했다. 당시 북한 청년들 사이에서는 TV드라마 ‘가을동화’에 출연한 배우 송혜교의 인기가 가장 높았는데, 운 좋게도 송혜교를 닮은 여학생과 사귈 수 있었다. 왜 함께 남한으로 오지 않았냐고 묻자 현우는 “너무 위험한 길이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저는 혼자니까 훌쩍 떠나면 되는데 그 친구는 부모님도 계시고 탈북 하다가 무슨 일이 생기면 저 때문에 그 친구 인생이 망가져버리는 거잖아요. 떠나는 날 밤, 차마 간다는 말은 못하고 몇 마디만 얘기만 나눴어요. 내가 어디 갈지도 모르니까 오빠 없어도 행복하게 지내라고요.”
현우는 그녀도 아마 짐작은 했을 거라고 말했다. 당시 현우 엄마가 중국에 계셨고 엄마와 자주 연락하고 지내는 걸 여자친구도 아는 터였다. 떠난다고 말하고 싶어도 보위부에서 여자친구에게 제재가 들어갈 까봐 말을 하고 싶어도 꾹 참았다는 현우.
“여친도 이젠 20대 중반이 됐을 텐데 지금쯤 무얼 하고 지낼까요? 아마 좋은 사람이 생기지 않았을까요?”
<글. 기자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