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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서 온 영인이의 '파란만장 알바 적응기'

2013년 북한에서 중학교에 다니다가 남한으로 온 열일곱 살 윤희(가명, 함경도, 당시 열다섯 살)는 여름방학 기간 동안 생각만큼 점수가 잘 나오지 않는 영어 과목을 보충하느라 분주하다. 아직 영화관에도 안 가봤고 놀이공원도 한 번 안 가봤다는 윤희는 현재 남한에서의 학교생활이 맘에 들지만, 놀이만큼은 북한 친구들과 했던 게 훨씬 재미있단다.

‘양파튀김’ 하면 쉬운데, 왜 ‘어니언링’이라고 쓰나요?

이미지 북한에서 온 학생들이 한국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 큰 애로사항으로 꼽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영어로 된 메뉴 이름 외우기다. 피자가게 계산원으로 첫 ‘알바’를 시작한 영인 씨도 마찬가지였다. 손님들이 카운터로 와서 계산해달라며 카드를 내밀 때마다 한동안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베이컨 포테이토 피자, 고르곤졸라 치즈 피자, 슈퍼 콤비네이션 피자, 베이컨 수프림 갈릭 피자, 까르보나라 스파게티 등 메뉴가 낯설어 도통 외워지지가 않았다.
“어니언 링 하나만 해도 그래요. 그냥 양파튀김이라고 쓰면 되지 어니언 링이라고 하니까, 그것도 한글로 쓰여 있다 보니 더 못 알아듣겠는 거예요.”
그래서 생각해 낸 아이디어가 토핑된 재료의 사진을 보고 메뉴를 구분해 내는 것. 감자는 포테이토, 새우는 슈프림, 얇은 돼지고기 훈제는 베이컨 등등 토핑을 보고 메뉴를 외우고 발음을 연습하며 적응할 수 있었다고.

또 한 가지는 일을 분담하는 것에 익숙지 않다는 것이었다. 캐셔와 주방, 홀 서빙 등 아르바이트생마다 업무가 각각 나뉘어 있어서 자기 일만 열심히 하면 되는 데도, 눈에 보이는 일마다 쫓아가서 하는 습관을 고치지 못해 한동안 힘들었다고.
“북한에서 어릴 적부터 장사를 했어요. 감도 팔고 옷도 팔고 생선도 팔아봤는데, 이런 일은 처음 해봤거든요. 계산대에 서 있다 보면 홀에 빈 그릇이 쌓여있는 게 눈에 들어오고 저도 모르게 식탁을 치우고 있어요. 그러면 계산대 앞에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게 되죠. ‘돈 받는 일이 제일 중요한데 왜 거기서 그러고 있냐’면서 가끔 핀잔을 듣곤 했어요.”

비록 실수는 있었지만 남한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열심히 일했던 영인 씨. 그런데 어느 날 무단결근을 하게 됐다.
“엄마가 아프시기도 했지만, 사실 이상하게 그날따라 정말 일하러 나가기가 싫더라고요. 월급 바로 전날이었는데 그냥 말없이 하루를 쉬었어요. 무단결근에 대한 개념이 없었을 때였어요.”
영인 씨가 갑자기 나오지 않자 피자가게 주인은 대체 인력을 구하지 못해 개인 업무를 제쳐놓고 하루 종일 카운터를 봐야 했고, 단단히 화가 나 있었다. 그리고는 다음 날 출근한 영인 씨에게 월급을 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동안 도움이 된 것보다는 손해를 끼친 게 더 많다는 이유였다. 영인 씨는 부당하다고 따졌지만 소용이 없었고 결국 빈손으로 가게를 나와야 했다.
“그땐 뭘 몰랐으니까요. 지금의 저라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았을 거예요. 물론 한 가지 크게 깨달은 건 있어요. 절대 무단결근을 하지 말자, 몸이 아파 도저히 일하러 갈 상황이 아니면 친구에게 부탁해서 ‘대타’라도 보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갖게 됐죠.”
무단결근은 좋지 못한 행동이었지만 그렇다고 일한 대가를 지급하지 않은 피자가게 주인의 행동은 명백한 불법이었다. 영인 씨는 그 일로 상처가 컸지만 다행히 두 번째 아르바이트에서 ‘마음 따뜻한’ 사장님을 만나게 된다. 그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남한 친구들 바느질과 다림질을 못하던데요?

영인 씨는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던 중 동대문 옷 공장에서 시급으로 미싱사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봤다. 하지만 대학 수업이 들쭉날쭉 짜여 있어 공장에서 제시한 시간에 근무를 할 수 없게 됐다. 다행히 사장님은 수업이 없을 때 와서 일을 하면 되고, 시급이 아니라 완성한 옷의 개수에 따라서 알바비를 지급하겠다고 했다.
“공장 문을 닫은 뒤에도 미싱 일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학교 수업이 끝날 때마다 달려가서 3~4시간 열심히 옷을 만들었어요. 시간당 알바비를 받는 것보다 오히려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었고요.”

이미지 영인 씨 엄마는 북한에 있을 때 인근에서 이름난 미싱기술자였기 때문에 그녀도 자연스럽게 옷 만드는 일을 배울 수 있었다.
“남한에서는 재단사와 패턴사(옷 제작과정에서 치수를 재고 치수별로 웃본을 뜨는 사람)가 따로 있지만 북한에서는 미싱사가 둘 다 해요. 지금 북한은 어떤지 몰라도 10여 년 전쯤에는 거의 옷을 만들어 입었으니까 미싱을 잘 하면 먹고는 살 수 있었어요.”
영인 씨 동네는 군대 주둔지역이었는데, 대개 군인들은 10년 복무기간 동안 군복만 계속 입기 때문에 1~2년마다 헤지고 색이 바라곤 해서 군복을 주로 수선했다.
“새로 옷을 만드는 게 아니라 옷을 전부 뜯어낸 뒤 뒤로 뒤집어서 꿰매주면 새 군복처럼 보이거든요. 군인들은 대가로 쌀이나 고기, 수산물을 가져왔는데 어쩌다가 쪼꼬렛(초콜릿), 작은 빠다(버터) 등을 가져주기도 했어요.”

하지만 북한에서 썼던 것은 손으로 돌려서 하는 수동방식의 미싱으로, 영인 씨는 남한에서 전기재봉틀을 처음 써봤다.
“전기재봉틀은 힘 조절을 잘 못하면 너무 빠르게 움직이거든요. 그 속도감이 익숙해 질 때까지 손가락을 몇 번이나 찔렸는지 몰라요. 물론 작업속도도 빠르고 편리하긴 하죠.”
전기다리미도 처음에는 사용법을 몰라 헤매긴 마찬가지. 북한에서는 전기다리미가 거의 없지만 있다 하더라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석탄 위에 올려 달궈놓고 쓰곤 했다.
“누르는 게(버튼)이 너무 많은 거예요. 첨엔 뭔가 하고 버튼을 눌렀는데 스팀이 팍하고 터져 나와서 깜짝 놀랐어요. 다리미에서 스팀도 나오고 물도 나오니 훨씬 수월하더라고요.”

이미지 또 한 가지 마음에 드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실의 종류가 색깔별로 다양하게 있다는 것이었다. 영인 씨는 한국을 ‘실의 천국’이라고 표현했다.
“북한에선 주로 흰색, 검정색, 빨간색 실을 쓰거든요. 그런데 여긴 실 색깔이 너무 많은 거예요. 신났죠. 초록색 실 같은 건 북한에서 무척 귀하거든요. 귀한 색 실은 구할 수가 없으니 옷에서 뽑아서 사용하기도 했어요.”
3가지 색 외에 북한에서 자주 쓰는 또 다른 색깔의 실이 있는지 물어보니 영인 씨는 국방색 실도 흔하다며 웃는다. 군복을 10년간 입어야 하는지라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그런데 영인 씨는 남한에 와서 바느질을 못하는 여자 아이들이 많아 놀랐다고 했다.
“대학교 프로젝트 중 하나로 옷을 하나 만들었는데 애들이 바느질을 해놓은 거 보니 촘촘하지가 못해요. 거의 3cm쯤 씩 기워놔서 입었더니 겨드랑이가 다 보이더라고요. 북한에서 여자라면 당연히 바느질하고 매듭짓는 것, 다림질 정도는 할 줄 알거든요. 그런데 여기선 엄마가 다 해준다고 하더라고요.”

아르바이트 통해 책임감과 중요하단 걸 배웠죠

미싱 공장에서의 알바 경험은 영인 씨에게 이전 직장에서 얻은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연고’ 역할을 했다. 미싱 공장 사장님은 수업 때문에 아르바이트 시간을 배려해준 것 외에도 남한 생활에 대해 이것저것 알려주곤 했다.
“북한이야기가 나오면 먼저 질문을 하기보다는 자연스럽게 공감을 해주고 제가 못 알아듣는 말이 있으면 차근차근 설명해줬어요. 청약저축이나 보험도 들어야 한다며 돈 관리하는 법도 알려주셨고요. 물론 그분이 보험설계사는 아니세요.(웃음)”
점심식사를 주문할 때도 한식, 양식, 중식 등 다양한 종류의 음식을 먹어볼 수 있도록 했고 국내외의 여행지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영인 씨가 약속된 시간에 아르바이트를 나가지 못하고 많이 지각을 하게 됐다. 이전 직장에서 겪은 일 때문에 결근은 물론 절대 지각도 하지 않던 영인 씨였다.

이미지 “펑펑 울면서 공장에 갔어요. 무서웠거든요. 그랬더니 사장님은 웃으면서 생활하다 보면 지각할 수도 있는 거라고, 그것 때문에 돈을 주지 않는 나쁜 사람들은 거의 없다고 말해줬어요.” 영인 씨는 일을 그만둔 후에도 가끔 사장님을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곤 했는데, 얼마 전 미국에 다녀올 거라고 인사를 드리러 갔더니 여비를 보태주시기도 했다고.

자신의 경험에 비춰봤을 때, 영인 씨는 탈북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다고 했다.
“제가 남북한 대학생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대외 프로그램에 자주 참가하고 있는데 후배 탈북 대학생들이 가끔 프로그램에 참가신청을 해놓고도 안 나오거나 늦는 경우를 봐요. 그럴 때마다 우리가 약속을 안 지키면 북한 사람들 전체가 욕을 먹을 수 있으니 신중하게 행동하라고 이야기해주죠.”
영인 씨도 처음에는 ‘북한에서 왔으니 남한 사람들이 더 이해해주고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남한 사람들도 각자 소중한 자기 시간과 비용을 들여서 함께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일방적인 이해만을 바라서는 안 된다는 걸 알았다고 한다. 따라서 남한 사회의 시스템과 분위기에 적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책임을 질 수 있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탈북 후배들에게 조언했다.

<글. 기자희>

※위 사례에서 소개된 북한의 문화는, 북한이탈주민의 개인적인 경험에 의한 것으로 현재 북한의 상황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역과 탈북 연도를 참조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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