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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공감 좌충우돌 남한 적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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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누리는 것에 책임을 지는 곳이 남한

세상만사가 모두 나쁜 일만 있는 게 아닌 것처럼, 또 항상 좋은 일만 있는 것도 아니다. 원하는 한 가지를 가지면 또 다른 한 가지는 포기해야 하는 게 이치다. 다만 얻는 것과 포기하는 것 사이에 어떤 것이 더 이익이 되는 지를 따지고 사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남한에 온 북한이탈주민들에게도 항상 좋은 일만 있을 순 없다. 자유와 편리함을 얻은 대신, 그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질 줄 아는 것, 바로 남한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일종의 통과의례다.

“남한 아이들이나 깨진 바지 입고 다니지”

이미지 2009년에 남한에 온 아주머니 A씨는 올해 스물 다섯 살 된 여대생 딸과 아직도 옷차림 때문에 다투곤 한다.
“애가 자꾸 깨진 바지를 사와가지고... 깨진 바지 몰라요? 청바지 일부러 찢은 거, 북한말로는 깨진 바지라고 해요.”
북한에서 미싱사를 했었다는 A씨는 구멍이 나거나 찢어진 옷을 표시 안나게 잘 기울 수 있는 ‘소문난’ 기술자였다. 그런데 아이가 친구들과 옷을 사러 간다더니 ‘찢어지고 무릎이 뻥 나온’ 옷을 들고온 걸 보고 기가 찼다.
“북한에서는 깨진 옷 입고 다니면 쟤 남조선에서 왔네, 이러거든요. 언젠가(1984년) 남한에 큰 수해가 났었잖아요. 사람들은 그때 남한 생활이 완전히 열악해서 우리가 남한을 도와줬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러니까 이렇게 기운 옷 입은 애들을 보면 아직도 남한 아이들처럼 입었다고 말해요.”

그런데 딸의 헤어스타일도 A씨에게는 스트레스다. 단정하게 올려 묶고 다니면 좋을 텐데, 풀어 헤친채 양 옆 얼굴을 머리카락으로 가리고 다닌다는 것.
“그렇게 하면 얼굴이 갸름해 보인다나요. 선호도가 너무 다른 거죠. 북한에서는 얼굴형이 둥근 보름달 같아야 환하고 이쁘다고 하거든요. 갸름하니 삐쭉하게 말랐으면 먹지 못하는 집 애라고, 여비었다고 말해요.”

자장면처럼 새까만 음식을 어떻게 먹어요?

이미지 가정주부인 A씨는 남한 음식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그런데 떡볶이와 자장면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음식이었다. ‘도대체 왜 떡에 고춧가루를 묻혀서 먹느냐’고 대뜸 묻는다. A씨 동네(함흥)에서는 ‘암만 없는’ 살림이라도 설 명절 때 만큼은 떡을 3~4가지 해먹는데, 떡에 양념을 묻혀 먹진 않는다고.
“차례지낼 떡에 어쩌다 붉은 반찬양념이 묻으면 그 부분을 칼로 도려내서 버리잖아요. 깨끗하지 않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런데 여기선 막 일부러 빨간 걸 묻혀서 맛있다, 맛있다 하니까 되게 신기하고 이상했어요.”

자장면도 마찬가지다. 함흥은 중국과 거리가 멀어 면장(춘장)을 본 적도 없었고, 면요리는 주로 감자농마국수를 먹는다고 했다.
“소면이 중국에서 들어오긴 하는데 그걸 먹으려면 수준이 돈냥이나 있어야 해요. 만약 소면을 먹는다 해도 잔치국수 육수처럼 맑게 만들어 먹지 까맣고 걸쭉한 소스에 비벼가지고 먹진 않거든요. 자장면 색이 너무 검다보니 먹고싶다는 생각이 아예 들지 않더라고요.”
물론 지금은 A씨도 자장면을 즐겨먹는다고 한다.

또 한 가지, 적응 안되는 음식이 있었으니 바로 냉면이다. 진짜 함흥사람으로서, 함흥냉면은 진짜 그 맛이 아니란다. 함흥의 신흥관에서 먹는 국수(냉면)는 달지 않고 새콤하며 시원해서 맛있는데 남한의 냉면은 너무 달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함흥지방에서 쓰는 면의 원료인 감자이야기도 들려준다.

감자는 함경도의 장진호 근처 농장에서 주로 가져오는데, 이 지역 이야기가 좀 슬프다. 장진호는 땅이 척박하고 해비침률(일조량의 북한말)이 3개월밖에 되지 않아 6월까지도 솜옷을 계속 입어야 할 정도로 추운 곳이다. 그런데 6.25전쟁 때 미 해병사단이 매복한 중공군과 맞닥뜨리게 되어 최대 7,000명이 전사하고 다수의 유해를 찾지 못했다고 한다. 다른 지역은 초가집을 허물고 개발을 했어도 얼음의 땅, 장진호 근처 만큼은 영원한 오지로 남아 65년 전 전사자들 역시 아직도 외롭게 그곳에 누워있을 것이라고 A씨는 말했다.

편리한 아파트 생활 뒤엔 관리비가 있답니다!

A씨는 남편이 먼저 한국에 왔고 이듬해 딸과 함께 남한으로 와서 남편과 재회했다. 남편은 아내와 아이를 위해 그동안 정부나 지역사회로부터 지원받은 물품을 다 정리해서 살기 편하고 아늑한 집으로 꾸며놨다.
“처음엔 잘 몰랐는데, 1년 쯤 지나서 샤워실 선반을 자세히 봤는데 화장품, 샴푸 같은 게 굉장히 많아요. 그런데 그중에 갈색통이 있기에 자세히 들여다보니까 초콜릿 소스더라고요.”
또 식료품 배달업을 하는 남편이 하얀색 뭉치 세 봉지를 받아왔는데 어디에 쓰는 건지 몰라 그대로 방치해 뒀다가 곰팡이가 피어서 버렸는데, 알고보니 그게 모짜렐라 치즈였으며 가격이 꽤 비싸다는 걸 알게 됐다고.
“그땐 아까운 치즈도 다 버리고, 아빠는 초콜릿 소스를 화장실에 두고 살았다며 가끔 가족끼리 웃곤 해요.”

이미지 이런 일도 있었다. 아파트 베란다에 수납공간이 필요했던 A씨 가족은 노원역 근처 목공소에서 판자를 사다가 공구를 이용해 선반을 만들었다.
“그냥 사이즈에 맞는 가구를 들여놓으면 되는 거 잖아요. 그땐 그걸 몰랐던 거죠. 이상하다 했어요. 공구를 이웃집에서 빌리려 했는데 톱을 갖고 있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A씨는 남한의 아파트가 살기 편한 것은 맞지만 북한에서 없는 ‘불편함’도 있다고 했다.
“처음 아파트에 들어왔을 땐 너무 좋더라고요. 김일성이도 못주는 집을 남한에서 주나,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는데 집도 다 준다 하면서요.”
그런데 웬걸, 조금 큰 소리라도 낼라치면 소음이 발생한다며 곧바로 방송이 나오고, 매월 임대료나 관리비 등 각종 공과금을 내는 게 좀처럼 적응이 안됐다고 한다. 또 ‘꽃밭’도 있고 경비아저씨기 주민들을 지켜주는 걸 보고 고맙게 생각했는데, 정원 관리비나 경비 용역비도 다 입주민들이 낸다는 걸 나중에 알고는 ‘내가 소유한 만큼 책임도 져야 하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이미지 A씨는 남한 사람들과 이야기 하다보면 자신이 마치 시골 사람처럼 느껴지고, 무슨 말만 하면 ‘여기도 70년대엔 그랬는데’라고 사람들이 말하는 게 싫었다고 한다. 특히 TV에서 예능프로그램을 보다가 사람들이 웃는 이유를 잘 모를 땐 답답하기만 했다고. 하지만 남한생활 6년차인 이제는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하다.
“타이어 같은 걸 허리에 메고 막 달리는 TV 프로그램을 보면 참 할 일도 없다 그랬거든요. 그런데 이젠 적응이 좀 됐는지, 아 즐겁게 살려고 저러는구나 하고 조금씩 이해는 돼요.”

<글. 기자희>

※위 사례에서 소개된 북한의 문화는, 북한이탈주민의 개인적인 경험에 의한 것으로 현재 북한의 상황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역과 탈북 연도를 참조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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