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단처럼 부드럽고 아름다운 강, 그래서 금강(錦江)이라 불리는 고운 물길을 옆에 끼고 백두대간의 크고 작은 산들이 빙 두르고 있는 고장은 아늑했다. 소란스런 세상 밖 이야기를 잠시 미뤄두고, 어느덧 봄을 지나 여름을 향해 가고 있는 이 계절의 평온함에 몸을 맡긴다. 늘 그렇듯 여행길의 햇살은 상냥하고, 바람은 보드랍다. 들녘을 적시는 물줄기마저 소박하고 한결 같은 곳. 이제는 긴 시간 한결같음이 쉽지 않은 일임을 잘 알기에, 자연의 ‘평범한’ 풍광에 감탄하고 감동한다. 충북 영동에서 만난 평범하고, 온전한 어느 여름날의 이야기다.
때 이른 무더위에도 강물은 고요하다. 비록 풍요로운 물길을 만나지는 못했어도 물어, 물어 길을 찾아 온 객을 맞이하기에 부족함은 없어 보인다. 떠나기 전 귀동냥하길 영동 산수가 가장 아름다운 곳이 양산이란 말에 양산의 8가지 절경 중 하나인 영국사부터 찾았다. 천태산 동쪽 자락에 자리한 영국사는 생각보다 아담한 크기를 자랑한다. 설악산에 비견될 만큼 빼어난 자태를 자랑하는 천태산의 깊은 산세를 눈으로 훑으며 온통 연둣빛으로 물든 여름 속을 지나 만난 것은 뜻밖에도 가을이다.
신기할 만큼 곱게 물든 단풍나무가 있고, 1,000년이 훌쩍 넘는 기간 동안 묵묵히 사찰을 지켜 온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223호)가 있는 곳. 진청색 단청 위로 보이는 하늘마저 유독 높고 파랗게 보인다. 마당 한 쪽, 너무 순해 도무지 짖을 일이라고는 없을 것 같은 백구와 눈인사를 한 뒤, 겹쳐마팔작지붕이라는 이름은 생소하지만 모양새는 멋스럽기 그지없는 지붕을 인 누각 만하루 등을 두루 둘러본다. 그러다 절집 마당을 뒤로하고 남쪽 오솔길을 따라 50여 m쯤 걸어 올라가면 원각국사비와 석종형부도도 구경할 수 있다. 사비에 관심이 없더라도 벚꽃이 진 자리 빨갛게 익기 시작한 버찌와 나무 냄새, 새 소리, 바람의 뒤척임까지 만끽할 수 있으니 천천히 걸어보길 권한다.
사찰 안을 느린 걸음으로 공을 들여 구경했다면 금강을 따라 남쪽으로 향해 본다. 양강(양산을 끼고 흐르는 금강을 지칭하는 말) 절경 중에서도 첫 손에 꼽힌다는 강선대가 지척이다. 급할 것 없이 흐르는 금강 한쪽, 우뚝 솟은 바위사이 비죽 고개를 내밀고 있는 정자가 바로 강선대다. 사실 아담한 정자 자체는 크게 볼 것이 없다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파른 바위와 강 그리고 노송들에 둘러싸인 모습은 풍류란 단어를 절로 떠올리게 만든다. 혹여 운 좋게 달 밝은 밤에 들릴 수 있다면 왜 이곳이 양산 제일의 절경으로 꼽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강선대까지 왔으니 송호국민관광지와 영의정도 놓치면 아쉽다. 금강을 사이에 두고 강선대 맞은편에 펼쳐진 송림이 바로 송호국민관광지다. 조선시대 연안부사를 지낸 만취당 박응종이 낙향해 후학을 가르쳤다는 곳이 여의정이며, 손수 뿌린 여러개의 나무 종자가 자라 가꿔진 것이 송호국민관광지다. 100여 년의 수령을 자랑하는 쭉 뻗은 소나무와 금강의 어우러짐이 아름다운 이곳은 방갈로와 놀이터, 수영장, 캠핑장이 마련돼 여름이면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길게 늘어진 소나무 그늘 아래 두 다리 쭉 뻗고 앉아, 잔잔한 강물을 바라보고 있자면 세상만사 급할 일이 뭐 있을까 싶어진다.
한번 주저앉으면 도무지 일어나고 싶어지지 않는 평온함에 한껏 게으름을 부린다. 여름해가 길어졌음이 다행이다 싶다. 오래 보고 가슴에 품은 금강을 향해 인사를 건넨 후, 이번에는 산골마을을 향해 달린다.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산골임에도 불구하고 짭쪼름한 바다내음이 풍긴다. 산에서 불어오는 청량한 바람에 몸을 말리고 있는 오징어 덕분이다. 부산, 울산, 속초 등 연근해에서 잡은 싱싱한 오징어를 영동에서 무주로 향하는 길목인, 이곳의 지하 170m 천연 암반수로 씻어, 바람에 말린다. 그래서 이름도 ‘산골오징어’다. 어획량과 판매량에 따라 오징어를 말리는 시기가 대중없기 때문에 산 아래 오징어를 말리는 진풍경은 운이 좋아야 볼 수 있다. 대신 짠맛이 적고, 깨끗하게 손질 된 오징어는 상시 판매한다.
느긋하게 걸어도 어느새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는 계절이다. 그래서 일까. 막 구워낸 오징어 한 쪽을 입에 물고, 지도를 펼치자 폭포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심지어 영동도 아닌 ‘충청북도가 지정한 자연관광 명소’란 타이틀이 붙은 옥계폭포로 향한 것은 여름날의 당연한 선택이다. 옥계폭포를 가자면 영동읍을 방면으로 향하게 되는데 이왕 걸음 했다면 읍사무소 뒤쪽의 공원 산책로를 걸어보는 것도 좋겠다. 야트막한 산등성을 따라 조성된 공원을 걷다보면 파란 지붕이 유독 많은 영동읍 시내의 풍경을 한 눈에 볼 수 있으며, 산책로 중간 쯤 하얀 충혼탑도 만날 수 있다. 6월은 ‘호국영령의 달’이다. 오늘 이 땅의 모든 이들이 감사해야 할, 잊지 말아야하는 이름들이 잠든 곳. 일 년에 단 하루지만, 온전히 그분들의 숭고한 희생을 위해 눈을 감고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산책로로 이어진 계단으로 오르기 전에는 6.25전쟁 참전유공자비도 위치해 있으니, 충혼탑을 가기 전 잠시 둘러봐도 좋겠다.
이번에야 말로 난계 박연 선생이 피리를 불던 곳으로 알려진 옥계폭포로 발길을 재촉한다. 30m 높이의 폭포는 하얀 물줄기를 유려하게 떨어트린다. 멀리서도 그 소리가 들릴 만큼 수량이 많기로 유명한 폭포 자체도 아름답지만 무엇보다 주변의 경관과 어우러진 모습이 일품이다. 새하얀 아치석교를 지나면 폭포를 바로 코앞에서 볼 수 있으며, 폭포 앞 이름 없는 6각 정자에 올라앉으면, 경관 전체를 둘러볼 수 있다. 한결같은 모습으로 자리를 지켜 온 자연의 품은 언제나 넉넉하다. 그래서 요란스레 등장한 나그네마저 마치 오래전부터 그곳에 있었던 양 자연스럽게 끌어안아 풍경이 된다. 그곳에 가면 사람도 풍경이 된다.
더도 덜도 말고 딱 기대한 만큼 아름다운 초여름의 자연에 마음껏 응석을 부리다 보니 속이 허하다. 시장에 내다 팔수 없는 잡고기를 끓여먹었던 것에서 유래한 어죽이 이 고장의 명물이다. 생선 잔가시가 녹을 정도로 뭉글하게 끓여낸 후 살을 한번 걸려내 다시 끓인다. 이때 육수에 마늘, 파, 깻잎, 콩나물을 더해 집고추장으로 간을 본 후, 수제비와 칼국수를 넣어 손님상에 낸다. 생각만 해도 입안에 침샘이 고일만큼 엄청난 맛은 아니다. 하지만 여름 시골에서 실컷 뛰어논 후 할머니가 끓여내 준 것과 같은 정겨운 맛은 언제 먹어도 물리는 법이 없다.
<글. 권혜리 / 사진. 나병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