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남녀가 부부의 연을 맺을 때는 마냥 행복한 날만 있을 것 같아도, 사실 신혼 초부터 한바탕 ‘전쟁’을 치르는 경우가 많다. 어렸을 때부터 각기 다른 환경 속에서 살아온 두 사람이기에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은 것은 당연지사다. 남북한 주민들도 마찬가지다. ‘왜 내가, 왜 나만…’ 이런 생각 보다는 북한이탈주민도 이왕 남한 사회에 왔으니 남한의 방식을 이해하려고 하고, 남한 사람들도 편견이나 오해 보다는 이해와 배려로 이들이 정착하는데 물심양면으로 아낌없이 도왔으면 좋겠다.
‘북한에서 평양시 다음으로 함흥시가 좋다’고 자랑하는 함흥 출신의 40대 초반 남성 A씨. 모바일뱅킹을 사용할 정도로 스마트기기에 능통해졌지만 아직도 컴퓨터용어가 익숙지 않다.
“미국말로 돼 있어 가지고 자꾸자꾸 잊어버려서 컴퓨터 앞에 써 붙여놨어요.”
사실 북한이탈주민들에게는 영어뿐 아니라 일터에서 사용하는 외래어들도 낯설기는 마찬가지다. A씨는 북한에서 철도 일만 18년간 해왔지만, 남한에서 사용하는 용어나 기술이 북한과 달라 철도 관련 일 대신 공사장 노동일을 선택했다. 하루는 개인 주택을 짓는 공사장에 나갔는데, A씨는 지붕 위에서 작업하는 기술자의 보조로, 작업에 필요한 공고들을 올려 보내는 일을 맡았다. 비록 ‘뺀찌(펜치)’나 ‘스빠나(스패너)’ ‘리아까(리어카)’ 등 일본식 단어들이 남북한 공통으로 사용되고 있기는 하지만, 처음 보는 낯선 공구들도 꽤 많았다. 북한에서 왔다는 것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예를 들어 카터기로 잘라서 뭐를 해라 이러는데 그땐 카터기가 뭔지 몰랐거든요. 공구는 가득 있는데 뭘 달라고 하는지 모르니까 아무거나 일단 올려주고 그 사람 표정을 살펴봐요. 표정이 일그러지면 아, 이게 아니구나 싶어 또 다른 것을 올려줘요. 이렇게 눈치 보며 일 했던 기억이 나요.”
북한이탈주민들은 남한 사람들끼리 주고받는 거친 말, 일상적인 언어습관에도 상당히 놀라워했다.
“이 ○○놈 새끼, 이러면서 서로 욕을 하는 거라. 한국이라는 나라는 의식 수준이 깨어있다고 생각을 했는데, 친구들끼리도 술 먹다가 욕을 하는 거예요. 첨엔 둘이 원수지간인가 이래 생각했다가 보니 친구에요, 둘이. 우리가 들었을 때는 쌍욕처럼 들리는데 한국에서는 그게 편한 사람들끼리 얘기하는 말이더라고요.”
체격은 크지 않지만 얼굴이 자그마하고 콧날이 베일 것처럼 오뚝한 북한이탈주민 남성 B씨. 외모를 칭찬했더니 깜짝 놀라며 북한에서는 ‘마깝지 않게 생겼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고 했다. ‘마깝지 않다’는 말은 편하거나 착해 보이지 않고 날카롭게 생겼다는 뜻.
“내가 째째불하고 그러니까 사람들이 편하게 말을 모(못) 걸어요.”
‘째재불하다’ ‘짜자불하다’는 말은 눈이 작고 좀 째졌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북한에서는 어떤 얼굴을 ‘잘생기고 이쁘다’고 하는 지 물었다.
“남남북녀라는 말이 있잖아요. 그런데 남한 사람들이 잘생기고 싶어서 잘 생긴 게 아니라, 자랄 때 환경도 사람 얼굴에 마이(많이) 관계되는 것 같아요. 북한에서는 일을 열심히 해도 국가 일만 해가지고는 어방 없으니까(턱없이 모자라니까) 장사와 같은 비법(불법)적인 일을 해야 하잖아요. 그래서 북한 남자들 보면 메말라있고 살결이 피어날 수가 없어요. 물론 군대도 안 다녀오고, 잘 사는 집안 애들은 다르지만요.”
개인적인 취향일 수도 있으나 B씨의 말에 따르면, 북한에서는 장동건이나 김태희 같은 스타일을 잘생겼다, 이쁘다고 하지 않는 것 같다고 한다. 눈과 입, 귀 등이 큼지막한 여자는 ‘안 곱다’고 말한다고.
“저 사람(남한 사람)들은 별나게 저런 여성들을 좋아하나 싶었어요. 척 봤을 때 단아하게 생기고, 유신(유순)해 보이면서도, 맹한 게 아니라 어델 가도 지 앞에 밥은 찾아먹을 수 있는 그런 여자가 좋지요. 남자도 띵글띵글한 사람이 아니라 헐치(쉽지) 않게 생긴 사람이 더 좋아요.”
특히 군대생활을 오래 한 일반 남성들은 대부분 ‘남자답고, 의리 있어 보이는’ 인상을 매우 선호하는 편인 것 같았다.
“우리는 성질이 그래요. 군대도 가자면 가고, 넘으라면 넘고. ‘이 것을 해야만 내가 산다’ 했을 때는 좌우나 아래 위를 보지 않고 ‘당과 수령을 위하여,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풀을 뜯어먹으면서도 일하도록 교육 받았고요.”
그래서 남자도 장동건보다는 차인표와 같은 얼굴형을 더 선호하는 것 같았다.
‘탈북 여성들이 출연해 이야기를 나누는 한 TV 프로그램이 인기를 얻으면서, 이 내용을 두고 북한이탈주민들 사이에서는 ‘맞다’ ‘아니다’ 논란이 좀 있는 모양이다.
어떤 이들은 “90%는 맞고 10%는 북한을 과장되게 이야기하는 게 있어”라고 하는 반면, “그 사람들이 다 겪은 거를 이야기한단 말이야. 난 하나도 과장됐다고 생각하지 않아”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사실 북한이탈주민들을 만나보면 나이나 지역, 탈북 시기에 따라서 천차만별의 경험과 생각들을 갖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평양에서 대학을 나오고 중앙 부서의 관료를 지낸 남성 C씨는 평양 호텔 등에서 사교춤을 추면서 맥주나 와인 등을 즐겼던 경험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함경도에서 온 아주머니 D씨는 “기름 같은 건 귀하니까 명절 때마다 100그램 요만한 비닐봉지에 싸서 덜렁덜렁 사들고 왔지요”라고 말하는가 하면, 20대 후반의 한 학생은 옥수수 껍질 말린 것을 채집해서 갈아 만든 종이(오사리지)에 글씨를 쓰는데 워낙 어두운 색깔이어서 연필로 쓰면 글씨가 잘 안 보일 정도였다는 경험도 이야기 해줬다.
대중교통도 “버스가 있긴 있는데 기름도 없고 고장도 잘나서 운행을 잘 모합니다(못합니다)”하고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평양 출신 C씨는 평양 지하철은 전시 목적이 있다 보니 굉장히 크고 화려하게 꾸며놓았다며, 처음 왔을 때 남북한 간 문화적 차이를 크게 느끼지 않았다고 말했다.
영어에 대해서도 의견이 많이 엇갈렸다. 아예 러시아어밖에 못 배웠다, 너무 기초 밖에 안 가르쳐줘서 잘 모른다는 청년들도 있었던 반면, ‘영어로 대화해서 밥 얻어먹을 수 있는 정도는 배웠다’는 남성도 있었고, 평양 출신의 C씨는 “학교에서는 영국식 발음으로 배웠는데, 미국식 발음을 익히기 위해 별도로 학원에 다녔다”고 말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한편, 북한에서도 대학을 다녔고 남한에서도 유명한 사립대학을 졸업한 C씨에게 남북한 대학생활의 차이는 무엇인지 물었다. C씨가 다닌 북한 대학의 경우, 동아리 같은 것은 없고 단지 1~4학년 동안 매년 봄가을 여행을 간다고 했다. 남한 대학의 경우 대학 재학기간에 여러 가지 활동을 할 수도 있고 다양한 추억을 쌓을 수는 있지만, ‘신입생 신고식’만큼은 정말 아닌 것 같다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학교마다 차이는 있습니다만, 제 모교는 ‘사발식’을 했어요. 남자는 막걸리 페트병 두 개를, 여자는 하나를 원샷 하거든요. 그래도 거기에다 양말을 빨고 치약을 풀고 그것은 좀… 아닌 것 같아요. 술은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적당히 즐겨야지요. 물론 저는 원샷 했어요. 과 기록도 있습니다(웃음).”
술 이야기를 한 가지 더 해보자. B씨는 처음에 남한에 와서 같은 또래의 남자들이 직장에서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고도 다음날 멀쩡한 것이 신기했다고 했다.
“우리는 예, 고등학교 졸업했을 때는 예, 깡끼가 셌어요. 그런데 열일곱 살부터 철도 한지에서 몸을 혹사했으니까… 레이루(레일) 하나만 해도 1m에 50kg이에요. 젊었을 때 기운을 한 16년 뽑고 나면 30대 이후에는 팍팍 고꾸라져요. 기운이라는 게 훌 가버리는 거예요.”
그런 B씨에게 만약 남한에서 태어났다면 어떤 직업을 갖겠느냐고 물었다.
“저는 군대를 가서 죽을 때까지 군대생활 할 거예요. 저어기 판문점 앞에 가서.”
이유를 물었더니 다른 나라가 우리나라를 절대 넘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란다.
“조선반도가 22만 평방미터라는 것은 세상이 다 알잖아요. 중국 땅 바로 아래, 그리고 러시아나 일본 그 새잠(사이)에 낀 작은 나라예요. 그래도 우리 둘(남북한)이 합치면 대한민국을 무시 못 하는 거예요. 중국도 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심사숙고를 할 거구요, 그런 나라가 언젠가는 돼야 되잖아요. 그러기 위해서는 군대가 강해야 하는 것만은 사실이구요.”
B씨가 군인이 되고 싶어 하는 이유는 또 하나 더 있다. ‘사람들 비위 맞추고 아부해 가며 사는 일반 직장이 도통 적성에 안 맞는 것 같아서’라고 했다.
“속통머리가 내 좀 못돼 먹어가지고 사회에서 요사람 발라 맞치고(비위 맞추고) 저사람 발라 맞치고… 요런 일은 못하겠다 말입니다. 그런데 군대 가서 지휘관들이 저기 갔다 와라 하면 갔다 올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는 캐나다에 잠시 머물렀을 때, 군대에 가지 않기 위해 캐나다로 이민 온 한국 남자들을 몇 봤는데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전쟁이란 게 없어야 하지만, 불가피하게 발발한다면, 나도 이 나라 국민이니까 우리나라가 이기길 바라지요. 저는 우리나라에 일익이 되면 오늘은 비록 내가 좀 고생스럽더라도 참고 열심히 해야 한다는 생각을 늘 해요.”
<글. 기자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