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을 전하다│또 다른 시선

“통일이 된다면 우리 형제들이 더 늘어나는 거겠죠?” 영회배우 에네스 카야

칸 카르데쉬(Kan kardesh). “형제, 그러니까 진짜 피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그만큼 가까운 형제요. 한국어로 하자면 ‘의형제’라고 할까요?” 흔히 터키사람들이 한국을 ‘형제의 나라’로 표현할 때 사용하는 말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가정을 중요시 여기는 터키문화에서 형제란 단순히 가까운 사이가 아닌, 기쁨도, 슬픔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사이를 의미한다. 그래서였다. 한국생활 12년 차의 터키인 에네스 카야(30, Enes Kaya)가 세월호 침몰사고 당시 유가족들을 위해 팽목항으로 자원봉사를 가겠다고 결심한 이유. 터키의 대지진 당시 한국인 봉사자들이 그랬듯 자신 역시 ‘형제’의 아픔을 위로하고 돕고 싶었다. 스스로를 ‘뼛속까지 한국인’이라 말하는 영화배우 에네스 카야를 만났다.

18살에 터키에서 온 이방인

180cm의 장신에 서글서글한 외모를 지닌 에네스 카야는 잡지모델, 방송, 영화 등을 통해 대중들에게도 친숙한 외국인 방송인이다. 처음 에네스 카야를 만나는 한국사람이라면 놀라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서글서글한 외모만큼이나 털털한 태도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화려한 한국어 실력이다. 특히, 외국인 특유의 어색한 억양이 아닌 자연스러운 발음과 억양 때문에 전화통화를 할 때면 종종 한국 사람으로 오인 받는 경우도 있을 정도라고. 물론 처음부터 그도 지금처럼 자연스러운 한국어를 구사한 것은 아니다. 실제로 한국에 오기전까지만 해도 단 한 번도 한국어를 배우거나, 한국에 살게 될 거란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단다.

에네스 카야 “한국에 처음 온 게 2002년 9월 22일이었어요. 그때 수능시험 끝나고 얼마 안됐을 땐데, 아버지가 친구 분이 한국에 있는데 살기 좋다고 하더라며 한국 갈래? 라고 물으셨어요. 그래서 그냥 좋아요 했죠. 그런데 정말 그 다음 주에 한국행 비행기를 태우시더라고요. 하하. 그때 제가 18살이었어요.”


내가 사랑하는 한국, 한국 사람들


처음 밟은 아시아의 낯선 땅. 더럭 겁도 났지만, 처음 도착한 그날부터 12년이 지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한국에 온 것을 후회한 적이 없다. 에네스가 낯설기만 한 한국을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은 첫 날 만난 한 택시기사의 친절이 도화선이 됐다고 말한다.

“공항에서 외국인이 택시를 타니까 기사 아저씨가 어디서 왔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터키라고 말했더니, 단번에 ‘형제의 나라’라고 하시며 간식도 꺼내주시고, 차비도 깎아주셨어요. 그때만 해도 옛날이라 지하철을 타면 어른들도 외국인이라고 오히려 자리를 양보해 줄 만큼 정이 넘쳤거든요. 그러니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능숙한 한국어 역시 한국에 오래 머물기 위해서는 반드시 잘해야겠다는 생각에 노력한 결과다. “터키어와 한국어는 어순이 비슷한 것 빼고는 다 달라요. 사실 처음에는 한국이 중국어 비슷하게 쓸 거라고 생각해서 걱정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막상 와보니 한국어는 다르더라고요. 1년 정도 건국대 어학당을 다니긴 했지만 책을 본 시간보다 떠든 시간이 더 많아요. 선생님이 귀찮아 할 정도로 말을 많이 했는데, 덕분에 발음 교정에는 확실히 도움이 된 것 같아요. 하지만 아직도 ㅎ(히읃)받침이나 쌍 시옷 같은 건 어려워요.”

'대세' 김수현도 제친, 따뜻한 케밥 이야기

혈기왕성한 나이에 홀로 생활하다보니 사건사고도 많았지만 그래도 되돌아 생각하면 그만큼 운이 좋았던 것도 사실이다. 대학장학금을 받아 한양대학교에서 정보기술경영을 전공했고, 강남에서 소위 말하는 길거리 캐스팅으로 방송에 데뷔했다. 또 2009년에는 FC 서울의 귀네스 전 감독님의 통역을 맡아, 축구팬들에게 얼굴을 알렸다. 그리고 최근에는 잘 알려지다시피, 세월호 침몰사고 당시 봉사활동으로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에네스 카야 “12년을 한국에서 살았지만 사람들에게는 아마 에네스 카야란 이름보다는 한국에 사는 터키인으로 인식 될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한국에 사는 터키인으로 도울 수 있는 일이 없을까 고민했죠. 처음에는 모금을 할까 했는데 그보다 따뜻한 식사를 챙기고 싶었어요. 혹시 홍보를 위한 일이라 화제를 모을까봐 냅킨이며, 접시 등 모든 식기류에도 이름 한자 적지 않았죠. 다만 문화의 차이로 인해 오해가 생겨, 준비해간 2,000인분의 식사를 다 대접하지 못하고 철수해야 했지만 그래도 마음은 전했으니까 그걸로 만족해요.”

솔직히 처음에는 진심을 몰라준다는 생각에 속상하기도 했지만, 포털사이트 검색어에 배우 김수현의 기부금 3억을 제치고 1위에 오를 만큼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많아 서운함 따위 금세 잊었단다. 진심은 애써 변명하거나 설명하지 않아도 전해진다는 사실 역시 이번 일을 통해 배웠다.

사실 어려운 일에 처할수록 새삼 한국의 저력에 놀라게 된다는 에네스는 이번 봉사활동에서도 오히려 큰 감동을 얻었단다.

“몸에 장애가 있으신 여성분이 묵묵히 유가족들의 옷가지를 모아서 깨끗이 빨고, 말리는 봉사활동을 하고 계셨어요. 빨래 자루가 무거워 보여 제가 들어서 트럭에 올려드렸는데 고맙다고 하시는데 눈물이 날 것 같았어요. 누군가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안됐다고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돕고 행동하는 모습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행복한 사람들이 사는 행복한 나라

에네스 카야 언젠가 나이가 들어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한국에서 오래 오래 살고 싶다는 에네스가 손꼽는 한국의 진짜 매력은 행복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지금 주위를 둘러보세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웃고 있죠? 내일을 계획하고, 각자 맡은 일을 열심히 하면서 여가를 즐길 수 있다는 것. 당장 등 뒤로 무슨 일이 벌어질까 겁내지 않아도 되고, 일상에 만족하고 행복해하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한국은 행복한 나라예요. 전 세계적으로 도덕적, 윤리적인 부분이 퇴색해 하고 있지만 한국은 아직도 안전하고 행복한 나라라고 생각해요.”

또한 한국전쟁이란 큰 시련을 겪고도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경제대국이 될 수 있었던 묵묵한 부지런함 역시 모국인 터키가 배웠으면 하는 부분이라고. 실제로 처음 유학길에 오를 때만해도 미국이나 유럽의 다른 국가도 아닌 하필 아시아의 작은 나라냐며 염려하던 친구들이 지금은 오히려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고 말해준단다. 한국에서 터키를 대표해 터키의 장점을 알리는 만큼 터키에서는 한국 자랑에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는 에네스.

칸 카르데쉬(Kan Kardesh), 형제의 나라

사실 에네스의 모국인 터키와 한국 관계에 대해 짚어보자면 한국전쟁을 빼놓을 수 없다. 터키는 한국전쟁 당시 파견된 UN연합국 중 한 곳이었으며, 역사적으로 따지자면 먼 옛날 고구려와 돌궐은 정치적 친선관계를 유지해왔다. 쉽게 말해 한국과 터키는 오랜 역사만큼이나 긴 우호관계를 유지해왔다. 또한 한국과 터키 양국은 서로를 ‘형제의 나라’로 칭하며, 친근함을 표시해왔다. 터키참전용사들 묘지 “보통은 6.25전쟁부터 두 나라가 가까워졌다고 말하지만 제가 알기론 예전에 돌궐과 고구려는 우호관계여서 서로 결혼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대요. 그러니까 어쩌면 우린 말로만 ‘의형제’가 아닌 진짜 피를 나눈 형제 국 일지도 몰라요.”

터키가 이슬람 경전의 가르침에 따라 외지인을 대접하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는 국가이긴 하지만 한국에 가지고 있는 친근함은 조금 더 특별하다는 설명이다.

어렵지만 반드시 이뤄야 할 일, 통일

터키에서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어른들의 이야기를 접하며 자란 그에게 통일은 어떤 모습일까? “한국 오기 전에 간혹 한국 전쟁영화를 봤어요. ‘고지전’ 같은 영화가 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는 사실이 슬프고 안타까웠죠. 터키도 비슷한 일이 있어요. 테러가 있고, 미움도 있죠. 남북한 문제가 무엇보다 슬픈 건 서로 미워하지만 형제라는 사실이에요. 그러니 통일은 당연히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렵겠지만 이뤄져야 하는 일이 통일이라고 생각해요. 통일이 된다면 우리(터키인) 형제가 더 많아지겠죠?” 김기덕감독과 함께 요즘 에네스는 누구보다 바쁘다. 올 여름 개봉 예정인 영화 ‘은밀한 유혹’의 추가 촬영과 각종 방송, 최근에는 무역 컨설팅일도 시작했다. 그 중 재능 많은 에네스가 가장 욕심내는 분야는 연기다. 물론 외국인 배우로서의 한계점을 알고 있지만, 유명해지겠다란 생각보다 연기를 즐기고 싶다는 생각에서다.

“한국에 와서 제가 상상했던 제 미래가 바뀌었어요. 그것도 아주 멋지게요. 그러니 할 수 있는 일들을 즐기면서 지금처럼만 잘 지내고 싶어요. 아마 행복한 나라에 살아서 더 행복해지나봐요.”

<글. 권혜리 / 사진. 나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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