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통일 | 여행이 문화를 만나다

풍류 따라 선비 따라, 꿈결 같은 가을 길
경남 함양

이제 나도 한 잎의 낙엽으로, 좀 더 낮은 곳으로, 내리고 싶다

황동규 <시월>

경남 함양

어느 빛나는 가을날, 남덕유산이 돌아앉아 남쪽의 지리산을 바라본다. 두 산은 멀어지지도 가까워지지도 않은 채 그렇게 마주 바라보며 영원히 그리워한다. 천 년이고 만 년이고 애달프다. 두 산이 뜨겁게 맞잡은 자리에 꼭 안긴 함양, 이 땅에서 남강이 발원해 풍요로운 대지를 물들이고 결국 바다에 이르러, 여기 처음처럼 맞절하는 산맥과 물줄기들이 부끄러워 붉게 물들었나니. 우리의 시간이 맞닿아 깊어지는 가을, 천 년의 숲 상림을 거닐었다.

사유로 빚어낸 저 너머
천재들의 숲, 상림(上林)

상림의 역사는 천 년이 넘었다. 통일신라시대 인물인 최치원이 태수로 있으면서 홍수를 막기 위해 강물을 돌리고 둑을 쌓고 나무를 심어 가꿔 만들었다고 한다. 그 명칭의 유래를 살펴보면 처음엔 대관림(大館林)으로 불렸으나 이후 큰 홍수가 나서 중간 부분이 유실되었고, 남은 위쪽을 상림, 아래쪽을 하림으로 부르다가 상림만이 현재까지 이어져 왔다고 한다. 가을이 되면 오솔길이 단풍에 물들어 더욱 아름다운데, 먼 세계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를 만큼, 영원히 거닐고 싶다.

숲 내의 역사인물공원에는 오래된 비석들과 함께 역사 속의 인물들의 동상이 위상을 견주며 당당하게 서 있다. 가운데 상석에는 한 편의 글로 당나라 황소의 난을 진압한 문장가 고운 최치원 선생이 위시하고 있고, 열하일기로 조선후기 문장을 주도한 연암 박지원을 포함해 성리학의 거두로 손꼽히는 일두 정여창 등 혼란의 시대를 한스럽게 살다간 천재들이 줄지어 있다. 정파와 역사에 휩쓸려 다친 뒤 이 함양의 자연에 은거하며 백성을 돌본 선비들이다. 맨발로 광야를 내달린 가엾은 생이여. 이들은 역사에 매여 굴곡진 인생을 살았지만 오히려 글을 바르게 펴고 백성을 이롭게 하는 법을 모색했다. 자갈밭을 갈듯 자신의 꿈을 갈아 이 함양 땅에서 이상을 일구었다. 이들은 이제 이곳에서 신선이 되어 숲을 수호하고 있다.

▲ 작은 개울을 따라 이어지는 상림의 산책로

숲에는 물레방아가 열심히 돌고 있는데, 연암 박지원 선생과 관련된 숨은 사연이 있다. 연암 선생은 이 함양 땅에서 필생의 공력을 모아 <열하일기>를 써냈고, 물레방아를 만들어 수력으로 곡식을 탈곡하게 해 백성의 생활을 도왔다. 이 물레방아는 함양의 연암물레방아공원에 실물로 아직까지 건재하게 시간을 돌리고 있다. 숲길 곳곳 마주치는 수목은 400여 종이 넘어 식물학상으로도 가치가 높다는데, 그렇게 오래도록 무진무진 모아 놓아도 어느 한 곳 흐트러짐 없이 깨끗하다. 국내에서 가장 큰 연꽃밭은 가을에도 그 초록빛이 생생하고 향기롭다. 걷노라면 마음이 따뜻해져서 무정하게 나를 끌고 가는 이 운명이라도 으스러지게 부둥켜 안아보고 싶어진다.

▲ 역사인물공원의 11개의 인물상

‘ ▲ 박지원의 정신을 기린 물레방아

고택 마당에 앉아 즐기는 정취,
개평 한옥마을과 일두 고택

오래전 함양에 정여창이라는 젊은 선비가 있었다. 영민하고 청렴하고 그 덕이 높았다고 칭송이 자자했다. 그는 한때 세자의 스승 노릇을 했는데, 자신이 가르쳤던 어린 세자 연산군이 자라 왕이 되었을 때 정여창 선생의 운명은 방향이 헛돌기 시작했다. 연산군은 정여창 선생의 스승 김종직과 그 제자들을 향해 칼날을 겨누었다. 절친한 벗들과 함께 사화에 휩쓸려 평생 유배 생활을 하며 그는 평생 광야를 내쫓겨 달렸다. 평생을 떠돌면서도 그는 자신의 학문을 완성해 우리나라 다섯 현인, 동방오현(東方五賢) 중 한 사람으로 존경받게 된다.

▲ 일두 정여창선생의 고택 대문 상단, 효자를 기리는 정려비가 붙어 있다

주변에는 구석기 유물을 발견한 장소를 박물관으로 꾸민 수양개선사유물전시관이 있다. 이곳 수양개의 구석기 유물 중에는 중학교 국사 교과서에 실린 ‘물고기 모양을 새긴 예술품’ 등의 귀중한 유적이 많아 역사 교육장으로 큰 가치와 의의를 지닌다. 전시관 뒤편으로 나가면 터널을 불빛으로 가득 채운 ‘수양개빛터널’이 있다. 문을 열어젖히니 불빛이 가득 차 있었다. 지금껏 우리가 마주치던 답답한 시멘트 냄새나는 터널은 여기에 없다. 이곳의 터널은 낯설고, 어쩐지 훨훨 날아가는 기분마저 든다. 터널의 끝에 환한 불빛이 새어 들어오는 문이 있었다. 저 문을 열면 무엇이 있을까, 기대하며 밖으로 나가니 결국 우리가 방금 서 있던 그 세상이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순간, 이 모든 순간이 천국이고 극락이 아니었을까. 터널의 끝에서 다시 마주하게 된 우리의 생이 반갑다.

정여창 선생은 ‘한 마리의 좀벌레’라는 뜻의 ‘일두(一蠹)’라는 호를 썼는데 이는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겠다’는 뜻으로 권력의 외연에서 평생 자신을 완성해나간 그의 생애를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그는 소문난 효자이기도 했는데 이후 그 후손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져 내려와 그의 고향집인 일두 고택 대문에는 효성을 치하하는 정려패(旌閭牌)가 다섯 개나 달려 있다. 3천 평 정도의 집터에 솟을 대문, 행랑채, 사랑채, 안채, 사당 등 11개의 건물이 들어서 있다.

함양 개평마을은 상업화된 곳과는 다른 느낌의 한옥마을로, 안동 하회마을, 경주 양동마을과 함께 전통가옥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손꼽힌다. 일두 고택을 중심으로 개평 마을에는 오담 고택, 풍천노씨 대종가, 노참판댁 고가 등 문화재급의 고택 60여 채가 잘 보존되고 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고자 했지만 개평마을에서 전통가옥이 훼손될 것을 우려해 고사했다고 한다. 정여창 선생 집안인 하동 정씨의 전통주 솔송주는 향이 그윽하기로 이름난데, 술 한 잔에도 선비의 향기로운 자취가 영원토록 남아 있었다. 고택을 그저 지나치기 아쉽다면, 여기서 하룻밤 묵어가며 맛있는 밥 한 끼, 술 한 잔 사먹을 수 있다고 하니 마치 고향에 온 듯 마음이 더 없이 푸근하다.

▲ 일두 정영창 선생의고택 사랑채

‘ ▲일두 정영창 선생의 고택 안채

푸른 강물 위에 내려앉은 정자 여럿,
선비문화탐방로

함양은 본디 남덕유산 육십령재를 넘어가기 전, 남도에서 상경하는 유생들이 이곳에서 잠깐 숨을 고르던 자리였다. 큰 고비를 넘기 전, 오히려 마음과 몸을 가다듬고 체력을 보완하기 위한 지혜는 비단 고개를 넘는 일뿐이겠는가. 갈 길이 멀고 고된 생애 어느 지점, 그래도 잠시 쉬며 추슬러 가라는 지혜는 우리네 인생사 어디에나 교훈이 되는 말이 아니겠는가. 지친 몸을 비로소 이곳에 부려 잠시 쉬어가도 된다고 허락을 받은 듯 마음이 가볍다. 어디에 앉아도 풍광은 더 할 나위 없다. 이곳은 옛날부터 정자와 누각이 줄지어 세워져 앉아 쉬기 좋은 곳이 많았다고 한다. 거연정을 출발점으로 잡아 물길을 따라 6km 남짓 두어 시간 거리의 걷기 좋은 길이 이어지는데, 이를 최근 다듬어 만든 산책길이 ‘선비문화탐방로’이다.

▲ 정자 문화의 보고라 불렸던 화림동 계곡

‘ ▲ 바위 위에 올라앉은 거연정

한때는 ‘팔담팔정(八潭八亭)’으로, 또 ‘정자 문화의 보고’라 불렸던 화림동 계곡을 따라, 현재 이어져 오는 정자는 7개가 있다. 특히 군자정, 거연정, 동호정은 조선시대 지어진 그대로 잘 보존되어 가치가 높다. 영귀정, 람천정 등 1970년대에 복원된 정자도 꽤 기품이 있어 사랑받는다. 안타까운 것은 얼마 전 불에 탄 농월정은 그 모습을 볼 수 없고 흔적만 남아 있다.

▲ 일두 정여창 선생이 중수한 광풍루

선비길이 시작되는 거연정은 주자의 시구인 ‘한가히 내 자연을 즐기다[거연아천석(居然我泉石)’에서 따온 이름으로 암석 위에 올린 다소 높은 위치의 정자에서 밖을 내다보면 하늘 가마를 탄 듯 황홀하다. 그 곁에는 일두 정여창을 기려 만든 소박한 군자정이 있고, 조금 더 가면 겹처마에 팔작지붕을 얹은 동호정을 만날 수 있다. 한때 풍류객들은 바위에 패인 웅덩이에 막걸리를 붓고 꽃잎이나 솔잎을 띄워 바가지로 퍼마시며 즐겼다고 한다.

가을 하늘을 벗으로 삼고, 누렇게 익어가는 들을 사랑으로 삼아 걷고 걷다보니 선비길의 끝에 다다른다. 마지막 코스는 광풍루로, 금천변을 배경으로 서 있는 일두 정여창 선생이 중수한 관아 객사다. 금천변을 배경으로 선 고풍스러운 이 누각은 200여 년 전 연암 박지원 선생이 특히 사랑하였다고 하며, 근처 제방에 조성된 갯버들 숲 ‘오리숲’도 연암 선생이 조성했다고 한다. 방랑벽을 뽐내던 그들은 무엇을 담고 무엇을 비우려 하였는가. 가슴에 이상향을 소중하게 품고 와 이 골짜기에서 광활한 미래를 꿈꾸었던가. 저 깊은 숲 속으로 인생도 길도 이어진다.

▲ 광풍루 앞을 흐르는 금천

<글_김혜진, 사진_김규성>

※ 웹진 <e-행복한통일>에 게재된 내용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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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발행 : 2017-11-09 / 제5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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