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콤플렉스는 내 삶의 훈장
뷰티 전문가 박진선 원장

젊음의 거리 홍대 앞, 한 뷰티숍에는 아침부터 예약 전화가 밀려왔다. 스킨, 네일, 왁싱이라고 써있는 방에는 세 명의 뷰티
전문가들이 한 자리씩을 차지하고 친구 같은 손님들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눈다. 열일곱 꽃다운 나이에 탈북해 ‘자신’과 ‘꿈’을
찾아 뜨거운 열병을 앓았던 박진선 원장을 만나봤다.

박진선 원장

약속을 지킨 선교사와 기나긴 탈북여정

열일곱 진선 씨는 한국에서 낯선 사춘기를 맞았다. 모든 게 새로운 남한 땅, 십여 년 만에 다니게 된 학교와 친구들, 그 틈에 앉아있는 자신마저 낯설게 느껴졌다. 표현은 안했지만 진선 씨의 부모님도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온 가족이 한국에 올 수 있었던 건 기적이었다. 실종된 아버지를 찾겠다고 나간 어머니가 1년 넘게 돌아오지 않았고, 일찌감치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던 오빠와 진선 씨도 친가와 외가로 흩어져야 했기 때문이다.

‘ ▲ 박진선 원장이 운영하고 있는 뷰티숍 네일아트 룸

‘ ▲ 네일아트 중인 박진선 원장

그 사이 어머니는 수용소 생활을 했다. 중국에서 아버지를 찾다가 북송된 까닭이었다. 반 년 동안 수용소에 계셨던 어머니는 아픈 몸을 이끌고 돌아오셨는데, 청진에서 해령으로 돌아오는 차안에서 한 선교사를 알게 됐다.

선교사는 자신이 중국으로 가는 것을 도와주면 진선 씨네 탈북을 돕겠다고 제안했다. 당시 열 두 살이었던 진선 씨는 낯선 사람의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온갖 고생 끝에 돌아온 어머니는 선교사에게 거처와 식사를 제공했고 마지막 날엔 돈까지 마련해주었다.

그리고 일주일 뒤 선교사가 돈과 약을 보내왔고, 어머니가 먼저 중국으로 향했다.

“며칠 있다 오빠랑 저도 넘어가기로 했는데, 하필 제가 신장염에 걸려서 걷지도 못하는 상황이었어요. 한 달 정도 앓았는데 처음엔 너무 아파서 실패하고, 다시 갈 때는 조금 나아져서 진짜 죽을힘을 다해 걸었어요.”

절망 끝에 찾아온 선물, 밝은 얼굴 찾아주기

한국에서는 대안학교에 들어갔다. 진선 씨네 탈북을 도와줬던 목사가 탈북 청소년들을 모아 한꿈학교를 세운 덕분이었다. 진선 씨는 학교를 다닐 수 있어 좋았지만 뒤늦게 찾아온 사춘기에 또 다른 고민이 시작됐다. 어릴 적 한쪽 얼굴과 팔에 화상을 입었는데, 이유를 묻거나 낯설게 바라보는 친구들이 있었던 까닭이다.

그때부터 진선 씨는 피부와 화장에 관심을 보였다. 처음엔 화상 자국을 가리려고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친구들을 꾸며주는 일에도 흥미를 느꼈다. 동시에 남모르는 방황도 시작됐다. “한국에 가면 1년 안에 화상 자국부터 수술해주겠다”던 부모님이 약속을 지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 ▲제22회 국제휴먼 올림픽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한 박진선 원장

‘ ▲싱가포르 ‘코리아 뷰티센터’ 시절 동료와 함께

“여러 병원을 알아봤는데, 당시 3~5천 만 원이 든다고 하더라고요. 수술이 한 번에 안 될 수도 있고요. 결국 돈 때문에 못하는 상황이 됐는데, 그게 어찌나 서럽던지 하루 종일 대성통곡을 했어요.(웃음)”

이날을 계기로 진선 씨는 질풍노도의 6개월을 보냈다고 한다. 철석같이 믿었던 희망이 꺾여버렸으니 화가 날만도 했다. 그런데 몇 달 뒤 뜻밖에 기회가 찾아왔다. 이런 저런 방법을 찾던 아버지가 극동방송에서 진행되던 ‘밝은 얼굴 찾아주기’ 프로그램을 알아내 지원을 받게 된 것이다.

스무 살, 낭만보다 하드 트레이닝

흉터를 치료하는 사이 진선 씨는 스무 살이 됐다. 대학이든 취업이든 진로를 결정해야하는 시기였는데 한꿈학교 목사님이 ‘뷰티 공부’를 권하며 세계사이버대학 학과장인 조군자 교수를 소개해주셨다. 화상 자국 때문에 갖게 된 관심이었지만 친구들 꾸며주기를 좋아했던 진선 씨를 기억한 이유에서다.

' ▲ 스킨케어를 준비하고 있는 박진선 원장 진선 씨를 만난 조군자 교수는 먼저 메이크업 모델을 제안했다. 흉터를 가리려고 매일 얼굴을 가리고 다녔던 진선 씨에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하지만 일을 시작한 지 1년이 됐을 즈음 위기가 찾아왔다. 뷰티 전문가가 되기엔 기술은 물론 말투나 기본적인 생활습관이 따라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교수는 수저 놓는 것부터 시작해 생활 전반에 걸친 하드 트레이닝을 강행했다.

“그만두겠다고 엄청 떼를 썼어요. 친구들은 다들 대학생활의 낭만을 즐기고 있는데, 저는 왕복 3시간씩 걸려 하루 12시간을 일해야 하니까 비교도 되고 힘들더라고요. 근데 엄마가 첫 직장에서 포기하면 앞으로 다른 힘든 일 앞에서도 포기하게 될 거라고, 조금 더 견뎌보라고 하시더라고요.”

진선 씨는 그렇게 5년여의 시간을 버텼고, 대학 졸업 후에는 국가에서 지원하는 케이무브 프로그램을 통해 싱가포르로 떠났다. 6개월간 영어공부와 인터뷰 트레이닝을 받아 해외취업을 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그곳에서 진선 씨는 두어 번의 넘어짐 끝에 ‘코리아 뷰티센터’에 들어갔다. 한국으로 돌아가려던 찰나, 하루 전날 면접 본 곳에서 진선 씨를 매니저로 채용하고 싶다고 제안한 것이다.

뷰티 전문가 박진선으로 돌아오다

싱가포르에서의 1년은 진선 씨에게 큰 에너지가 됐다. 경력이 쌓여도 월급이 오르지 않았던 이전과 달리 싱가포르에서는 실력에 대한 인정과 보수가 따랐기 때문이다. 한 번은 까다롭기로 소문난 손님이 “나는 박진선에게만 케어를 받고 싶다”며 패키지 5회치 팁을 쥐어준 일도 있었다. 한동안 “이 길이 맞나?”, “내가 잘 하고 있는 건가?”라는 고민에 빠져 있었는데, 때마침 답을 찾은 것 같았다.

“싱가포르에 다녀오지 않았다면 뷰티숍을 내는데 겁을 냈을 거예요. 외국에서 일하는 서러움이 크긴 했지만, 힘이 되는 인상 깊은 일들이 많았거든요. 덕분에 자신감도 얻고 용기도 얻은 것 같아요. 저한테는 삶의 에너지가 크게 바뀌는 시기였죠.”

' ▲ 네일아트 중인 박진선 원장 진선 씨는 올해로 창업 1년차가 됐다. 딱딱한 말투 때문에 면박 당하기도 여러 번, 전화 받기도 꺼려했던 사회 초년생 박진선이 어느새 10년차 전문가가 된 것이다. 그 사이 진선 씨는 뷰티산업 보건학 석사 과정을 밟고 국제 휴먼 올림픽 대상, 대한 미용사회중앙회 은상 등 온갖 상을 수상하며 월드뷰티문화축전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금은 또 다른 꿈이 생겼다. 뷰티 공부에 뜻이 있는 탈북민에게 기술을 가르쳐주어 훌륭한 뷰티 전문가가 되도록 도와주는 일이다.

“포기하지 않으니까 끝이 아니라 미래가 보이는 것 같아요. 처음엔 돈 벌려고 기술을 배웠는데 하다보니까 공부도 하고, 외국에도 나가보고, 제 숍도 생겼어요. 탈북민들을 돕는 것도 제가 노력만 하면 가까운 미래라가 될거라 생각해요.”

남들과 다른 자신을 부끄러워했던 열일곱 소녀 진선 씨는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이십대를 보내며 엎치락뒤치락 씨름을 했다. 하지만 그 덕분에 갓 삼십대에 접어든 지금은 내면까지도 아름답게 가꿀 줄 아는 진짜 뷰티 전문가가 됐다. 오롯이 자신과 꿈을 찾아 열심히 뛰고 있는 박진선 원장의 또 다른 행보가 기대된다.

<글, 사진_강문희>

※ 웹진 <e-행복한통일>에 게재된 내용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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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발행 : 2017-11-09 / 제5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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