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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bzine Vol.47 | 20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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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공감 | 좌충우돌 남한 적응기

실수도 1등 성실함도 1등,‘직장에서 눈치는 필수 코스죠’

남한에 오자마자 탈북민 생활보조금을 받는 대신 일자리를 먼저 구한 진선이는 식당과 프랜차이즈 아르바이트를 두루 거치다가 명동 한복판에 자리한 고급 미용실에 취업했다. 진선이는 말투 때문에 가끔 ‘조선족이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럴 때마다 ‘대한민국 주민등록증을 가진 북한에서 온 아이’라고 당당하게 말해왔단다. 한국 사람들과 일할 때는 ‘감추려 하기 보다는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면 진심으로 대해준다’는 걸 경험으로 알았다는 진선이는 ‘실수도 1등, 성실함도 1등’으로, 부대끼며 남한생활을 배운 덕분에 목표한 것들을 하나하나 성취해가며 남한생활 7년을 알차게 채웠다.

성실함 하나로 말단에서 대표 스탭까지 ‘초고속 승진’

진선이는 남한에 오자마자 미용 관련 자격증을 취득했지만, 마땅한 경력이 없어 주로 외식업 계통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제가 일을 하면 열심히 하는 성격이라 되게 좋아하셨다”고 말하는 진선이는, 치킨집 아르바이트를 했을 때도 자신을 ‘양엄마’로 부르라며 유독 잘 챙겨주시는 여자 사장님과 함께 일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양엄마’ 사장님은 진선이가 미용사 자격증이 있다는 걸 알고, 그녀가 자주 가는 명동의 큰 미용실에 일자리를 알선해줬다.

진선이는 정직원이 아니었지만, 항상 남들보다 일찍 출근하고 남들보다 늦게 퇴근했다. 8시에 오픈하는 가게에 7시쯤 출근해 미리 난방기를 켜놓고 여름에는 에어컨을 켜뒀다. 정시에 퇴근하는 다른 스탭들과 달리 진선이는 늘 늦게까지 남아 미용실 문을 잠그고 가곤 했다. 하지만 성실한 것만큼이나 ‘실수도 1등’이었다는 그녀. 미용학원에서 배우는 것과 실전이 너무 달랐고 모르는 말들이 많다 보니 “욕은 항상 빠지지 않았다”며 웃는다. 특히 롤판이나 아이롱, 스트라이프, 쇼컷트, 롱커트와 같은 외래어는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한번은 드라이를 가져오라고 하시더라고요. 알고는 있었는데 갑자기 생각이 안 나서 ‘드라이가 뭐예요?’라고 물었죠. 그랬더니 선생님은 손님 앞이라 화도 못 내고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해져서는 ‘거기 있잖아!’ 하고 눈짓을 하시더라고요.(웃음)”

실연당해 머리카락 자르러 온 여성에게 “왜 울어요?”

미용실 원장님과 직원들 전체를 긴장시킨(?) 실수도 있었다. 하루는 미용실 VIP 고객의 딸이 왔는데, 평소와 달리 우울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엉덩이까지 오는 긴 머리를 숏컷으로 자르고 싶다고 했다.
“원장님이 머리카락을 막 자르려는데 그 여자분이 계속 우는 거예요. 그냥도 아니고 펑펑요. 제가 왜 우느냐고 물었죠. 그랬더니 선생님들 얼굴이 완전히 사색이 된 거예요. 그 여자 분도 놀랐는지 저를 한 번 쳐다보더니 다시 막 울더라고요.”

일러스트 이미지알고 보니 이 여성에게는 양가 소개로 만나 오래전부터 사귄 남자가 있었는데, 최근 그가 바람을 피워 헤어지게 됐다고 한다. ‘긴 머리가 이상형’이라는 말에 한 번도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았던 그녀였다.
“실장님이 한쪽으로 불러서 왜 짤까닥(‘촐싹 맞게’라는 뜻의 북한말, 사진을 찍으면 찰카닥 소리가 난다는 뜻에서 나옴) 나서냐고 뭐라고 하시더라고요. 당장 가서 손수건이나 물티슈라도 갖다 주라고. 사실 궁금하기도 했지만, 나름 위로한다고 말 건 거였거든요. 북한에서는 실연 같은 게 일반적이지 않으니까. 그때 알았어요. 남한 여자들은 상처를 받으면 머리를 자른다는 걸요.”

진선이는 미안한 마음에 싹둑 잘린 긴 머리카락을 모아다가 예쁘게 태를 땋은(북한말, 머리를 땋는다는 뜻) 다음 상자에 넣어 선물했다. 그 여성은 기분이 좀 나아졌는지 웃으며 고맙다고 말했고 다행히 상황은 잘 수습됐다. 진선이는 그때 ‘아, 사회생활에는 눈치가 필요하구나, 눈치는 필수 코스구나’ 깨달았다고 했다.

매달 돈 보내며 혼자 사느니, 빨리 모셔오는 게 낫죠!

일러스트 이미지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일한 탓에 진선이는 말단 스탭으로 출발했다가 원장님 스텝으로, 그리고 다시 대표님 스텝까지 치고 올라갔다. 아침밥을 제대로 안 챙겨 먹고 출근한 뒤, 종일 바삐 일 하다가, 오후에 좀 한가해질 무렵에나 김밥 한 줄로 식사를 대신하던 진선이는 위경련이 오는 등 건강이 매우 나빠졌지만 빨리 돈을 벌어서 가족들을 데리고 오겠다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꼭 참고 일했다. 겨울엔 관리사무소로부터 ‘왜 이렇게 난방비가 적게 나오느냐’고 전화가 올 정도로 돈도 아껴 썼다.
“그런데 돈이 거의 모아졌을 때 가족들을 데리고 오려고 사람을 다섯 번이나 보냈는데 엄마가 겁이 난다며 안 오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젠 돈 안 보낼 거라 협박까지 해서 겨우 모셔왔죠. 엄마랑 동생 모두 남한에 온 걸 후회 안 해요.”

진선이는 남한에서 주는 정착금에 의존하기보다 차라리 빨리 한군데 ‘뿌리’ 내려서 한 2년만 참고 일하면 길이 보인다고 말했다.
“가족이 북한에 있으면 매달 50~70만 원씩 보내는데, 브로커 수수료까지 떼고 나면 정말 얼마 안 남거든요. 남한 문화가 신기하니까 돈을 헤프게 쓰는 사람들도 많은데, 너무 일찍 자본주의 문화에 물들기보다 열심히 일해서 가족을 먼저 데려와야 해요.”

토대 나빠 보안원 탈락, 남한에서는 경찰행정대 입학

북한에 있을 때 진선이의 꿈은 보안원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토대’가 좋지 않아서 ‘하나부터 열까지 다 걸렸다’는 진선이. 진선이의 아빠 역시 ‘영재’로 불렸지만 김일성 종합대에 붙었다가 석연찮은 이유로 최종 불합격 판정을 받는 등 ‘토대’ 문제는 대대로 진선이 집안의 발목을 잡았다. 진선이는 북한에서 접어둔 꿈을 이곳에서 다시 펼쳐보고 싶었다.
“남한에서 만난 북한 친구 혜미가 대학에 갔다는 소식을 듣고 저도 대학엘 가야겠다고 맘 먹었어요. 미용실을 그만 두고 준비해서 경찰행정학과를 갔죠. 북한에서 보안원이 못 됐으니까 남한에서 경찰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일러스트 이미지진선이는 다른 학우들과 나이 차도 많이 나고 레포트도 제대로 쓸 줄 몰랐지만, 학과 친구들이 북한에서 왔다는 걸 알고 언니 누나처럼 편하게 배려해줘서 즐겁게 대학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혼밥, 혼술(혼자 먹는 밥, 혼자 마시는 술)’을 해본 적이 없었다며 웃는다.

진선이는 대학 재학중 1년 간 휴학을 하면서 캐나다에 나가서 어학원 매니저로 근무했다. 그 덕분에 영어를 곧잘 했고, 특유의 친근감과 명랑한 말투 덕분에 대기업 계열사에 취직할 수 있었다. 이미 미용실 등에서 사회생활을 성공적으로 경험했던 진선이는 새로운 출발 앞에서도 거리낌이 없다. 비록 시작이 늦긴 했지만 대학에서 4년, 외국에서 1년간 추가로 쌓은 경험과 지식이 그녀의 앞길에 든든한 징검다리가 되어줄 것이다.

<글. 기자희>

나의 살던 고향은 / 농림산물·광물 풍부했던 길주, 지금은...

※ 위 사례에서 소개된 북한의 문화는 북한이탈주민 개인의 경험에 의한 것으로 현재 북한 상황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역과 탈북 연도를 참조해주세요. <나의 살던 고향은>은 북한이탈주민에게 듣는 내고향 이야기입니다.

※ 웹진 <e-행복한통일>에 게재된 내용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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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호 전체 기사 보기 기사발행 : 2016-12-01 / 제4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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