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적인 한파와 폭설 예보에 지레 겁을 먹고 옹그린 어깨가 무안할 정도로, 사찰로 향하는 소리길은 평온했다. 뽀드득 간간이 밟히는 눈의 기척만 아니었다면, 산 너머 요란스런 추위가 거짓말이라 했을 것이다. 겉보기엔 단단히 얼어붙었지만, 쉼 없이 졸졸 흐르는 홍류동계곡의 물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산책이라도 하듯 한가로이 걷다 보면 드디어 목적지에 다다른다.
그리고 다시 주변의 풍광과 어우러진 소박한 모양새 탓에 일주문 중에서도 아름답기로 손꼽힌다는 사찰의 일주문을 시작으로 봉황문, 해탈문의 문지방을 차례로 지나면 비로소 유구한 세월을 품은 천 년 사찰, 해인사와 마주하게 된다.
해인사는 신라 애장왕 3년에 창건해, 1,200여 년간 가야산 자락이 지켜 온 국내 3대 사찰 중 하나로, 아름다운 자연 풍광만큼이나 귀한 문화재를 많이 품고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그중에서도 단연 첫 손에 꼽히는 것은 세계 최초이자 최고(最古)의 목판본 고려팔만대장경판 (이하 ‘팔만대장경’, 국보 제32호)과 그 팔만대장경이 보관되어 있는 전각, 팔만대장경판(국보 제52호)이다.
‘팔만대장경’은 몽골과의 전쟁으로 나라 안팎이 혼란했던 고려시대, 민심을 하나로 모으기 위한 방편으로 부처의 일생과 가르침을 목판에 새긴 것으로 현존하는 대장경 중 가장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동시에 가장 오래된 유산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팔만대장경뿐 아니라 530여 년간 대장경이 보관되어 있던 장경판전 역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해인사에서도 가장 깊숙이, 긴 담장 너머 보존 중인 팔만대장경과 장경판전은 현재, 일반관람은 어려운 상황. 다만 대장경이 보관되어 있는 수다라장의 나무 창살 너머 조용히 잠들어 있는 대장경의 분위기를 엿볼 수는 있으며 바깥쪽에서는 복제본인 팔만대장경과 유네스코 인증서도 관람가능하다.
아쉬움을 뒤로 한 채 걸어 내려오면 신라 말기의 학자 최치원이 거꾸로 꽂아 천 년 고목으로 자랐다는 학사대전나무와 일주문 근처에선 성철 스님의 사리를 모신 사리탑이 있는 비림까지 두루 볼 수 있으니, 실망감에 젖어 주변을 둘러보는 것을 소홀히 하지 말 것. 살아가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이진 않을까. 이미 놓친 것들에 연연하느라 정작 주변의 다른 귀한 것마저 흘려보내는 실수를 하고 있지는 않은 지, 범종각 앞 눈 쌓인 해인도를 따라 걸으며 잠시 머릿속을 비워낸다.
해인사를 떠나 이번엔 합천댐 방향으로 향한다. 합천댐에서 시작해 황강으로 흘러가는 물줄기를 따라 달리다 보면 합천의 명소인 합천영상테마파크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합천의 빼어난 자연 속 자리한 영상테마파크에는 이름만 들어도 알 법한 드라마나 영화의 촬영장과 정겨운 옛 시절의 풍경이 가득하다. 간이역처럼 꾸며진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구매해, 안으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노면 전차가 시선을 사로잡고, 촌스러운 듯 익숙한 간판을 따라 걷다 보면 금세 광복 전후의 시가지 풍경이 펼쳐진다. 또 뒷골목으로 향하면 허름한 달동네와 동네 목욕탕, 대포집과 국수집이 이어진 7,80년대 서울 풍경도 만날 수 있다.
한창 인기를 모았던 드라마의 여파인지, 살아온 시대와 상관없이 오래된 포스터와 허름한 간판이 낯익어 빈 세트장임에도 한참을 기웃거리게 된다. 어떤 이름의 인연이든 동행한 이와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다는 점도 이곳의 매력일 것이다.
거닐며 볼 곳 많은 합천을 한눈에 내려다보고 싶다면 합천댐 아래, 영상테마파크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합천임란창의 기념관을 추천한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왜적과 맞서 싸운 선민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사당으로 내 땅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왜군을 향해 돌진했던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할 수 없었던 이야기에 절로 숙연해진다. 그리고 사당 앞에서 마주한 탁 트인 자연경관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 이 아름다운 땅이 바로 우리나라다.
합천의 자연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곳이 한 곳 더 있다. 바로 정양늪이다. 황강 지류 아천 천의 배후습지로 생태학적 보존가치도 높지만, 새로 단장된 목재 데크길과 황톳길, 듬성듬성 놓인 징검다리 덕분에 걷는 즐거움도 쏠쏠하다. 키 큰 갈대숲 너머 쉬어가는 철새들의 날갯짓을 보고 있자면, 곧 지나갈 이 계절도 조금은 아쉽게 느껴진다.
깊은 산과 깨끗한 물을 자랑하는 합천은 산나물이 맛좋기로 이름난 지역. 그중에서도 해인사 인근에는 고사리, 표고, 시금치, 토란, 도라지 등 가야산 일대에서 자라는 산채를 재료로 한 산채정식이 유명하다. 특히 춥다는 핑계로 게으름을 피우는 사이 멀리 떠난 입맛을 돋우기엔 제철 더덕만 한 것이 없을 것이다. 고추장 양념을 삼삼하게 해 구워낸 더덕구이에 20여 가지가 훌쩍 넘는 반찬을 앞에 두고 있자면 마음부터 건강해지는 기분이 든다.
<기사. 권혜리 / 사진. 김규성, 합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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