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스럽게 여행용 가방을 챙기며, 머릿속으로 떠올린 평창의 첫 이미지는 흔한 노랫말처럼 ‘저 푸른 초원 위 그림 같은 집’과 양떼들이었다. 그 뒤로 배경처럼 하얗고 큰 날개를 팔랑이는 풍력발전기가 있다면 완벽하리란 생각이 들었다. ‘뻔’하게 박제되어 있는 이미지라 할지라도 그 한 장의 풍경이 보고 싶어 떠나는 이들도 적지 않으리라. 그래서 당연하게도 평창의 첫 번째 목적지는 목장이 됐다.

청정의 자연을 자랑하는 평창에는 일반인에게 공개하는 체험형 목장이 여럿 있다. 그중 대표적인 곳이라면 몽실몽실한 양떼를 원 없이 만날 수 있는 대관령 양떼목장과 월드컵경기장 500개에 달하는 약 1,000만 제곱미터 규모의 대관령 하늘목장을 들 수 있다. 특히 1974년에 처음 문을 연 후 40여 년 만에 일반인들에게 개방을 시작한 대관령 하늘목장은 훼손되지 않은 자연경관을 뽐내는 곳이다. 들어 마시는 공기마저 달고 시원해, 계속 숨만 쉬어도 건강해질 것 같은 초원 위로 삼삼오오 머리를 맞대고 있는 젖소와 말, 양떼 무리가 보인다. 절로 웃음이 터지는 귀여운 모습에, 사진 찍기에 열중인 사이 개중 호기심 강한 녀석들은 슬그머니 나타나 방문객을 향해 아는 척을 하거나 사진포즈까지 취하는 여유를 보인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한참을 순진한 눈망울의 동물들과 인사를 나눈 뒤 다시 길을 오른다.

하늘목장이 자랑하는 최고의 풍경은 해발 1000미터에 위치한 하늘마루전망대에 오르면 볼 수 있다. 낮은 구름이 드리워진 하늘 아래 힘차게 돌아가는 풍력발전기의 흰색 날개가 드넓은 푸른 초지와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광을 뽐낸다. 저 멀리 퍼지는 안개 사이 산등성이마다 꼿꼿이 허리를 편 풍력발전기들이 제 몫의 일을 해내는 동안 간간이 흩뿌려지는 빗방울마저 개의치 않을 만큼 자연 그대로의 풍경은 오래도록 시선을 사로잡는다. 흐르는 시간만큼이나 조급했던 마음마저 느긋해지는 공간을 조금 더 만끽하고 싶다면 전망대에서 대관령 최고봉인 선지령 자락으로 이어지는 산책로 등 다양한 테마에 맞춰 정비된 걷기 길을 이용하길 추천한다.

시선이 닿으면 발길이 멈추고, 발길이 멈추면 한동안 머무를 수밖에 없는 자연을 앞에 두고 감탄하기를 여러 번 어느덧 산허리마다 한 움큼씩 고운 소금이 흩뿌려진 절경이 펼쳐진다. 부드러운 달빛이 흐뭇하게 쏟아지는 밤이 아니란 사실이 아주 조금 아쉽지만 그 사이 가을비에 젖어 더욱 반짝이는 뽀얀 메밀꽃무더기도 가슴 벅찰 만큼 곱다.

어떤 이야기는 그 자체로 풍경이 되기도 한다. 처음 마주한 메밀밭의 장관이 퍽 낯익다 싶다면, 눈을 감고 ‘소금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 아래 펼쳐진’ 메밀밭을 떠올려 보자. 중고등학교 교과서는 물론 심지어 컴퓨터 자판연습에도 빠지지 않고 등장해 친숙한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배경지가 바로 이곳 평창이다. 참신한 문장과 언어감각을 자랑했던 작가 이효석은 자신의 고향에 바치는 헌사와 같은 문장을 소설을 통해 풀어낸다. 덕분에 이맘때 이효석생가와 문학관이 자리한 봉평읍 주변은 메밀밭을 보기 위해 방문하는 관광객으로 북적인다.

문학관과 생가 외에도 ‘메밀꽃 필 무렵’을 테마로 한 문학의 숲 공원도 인근이라 거닐기 좋으니, 혹여 찬 기온으로 인해 메밀꽃무더기가 시들해졌다 해서 실망할 필요는 없다. 더욱이 찬 서리가 내린 직후 수확한 햇 메밀은 별미다. 또 문학관 앞 서점에서는 이효석의 소설을 구입할 수도 있으니 구수한 메밀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오랜만에 책을 다시 읽어보는 것도 늦가을에 어울리는 추억이 될 것이다.

가끔은 오래전 일이란 핑계로 너무 쉽게 잊어버리는 일들이 있다. 더욱이 가슴 아팠던 상처들은 되새겨 기억하기에 불편하다는 이유로, 더 쉽게 기억 속에서 지우곤 한다. 하지만, 잊어버린다고 상처가 더 쉽게 아무는 것은 아니다. 어떤 상처들은 오래 기억해, 다시 아플 일이 없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평창의 짙푸른 자연 속을 거닐다 문득 떠오른 이름 하나가 있어 일부러 찾아가 봤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7, 80년대까지만 해도 어렵지 않게 듣거나 볼 수 있었던 이 문장은 사실 반공정신을 일깨우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든 구호가 아니라 실제 아홉 살 소년이 북한 무장공비 앞에서 외쳤던 말이다. 소년의 이름은 이승복이다. 1968년 울진·삼척 지구로 침투한 북한의 무장공비들이 산자락의 소년의 집으로 숨어들어, 소년은 물론 일가족을 잔인하게 피살한 사건이 있었다. 후에 무장한 북한군 앞에서도 당당히 자신의 소신을 밝힌 소년의 용기와 억울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것이 바로 이승복기념관이다. 실제 소년이 다니던 초등학교와 생가를 복원한 기념관은 규모가 제법 큰 데다 주변 공원도 잘 조성되어 있어 일부러 찾아가 볼 만하다.

또 사후에 받은 훈장과 당시 무장공비의 무기 등 다양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으며, 이승복의 생애와 가족사 역시 자세히 볼 수 있다. 하지만, 가장 인상적인 것들은 검정 고무신 한 켤레, 밥공기 같은 일상적인 물건들이다. 투박하고 작은 고무신을 보고 있자면 그리 헛되게 생을 마감하기엔 너무 어렸던 어린 생명이 가련해 오래도록 가슴 한구석이 시리다.

가슴이 시리니, 좀 걷고 싶어졌다. 이왕이면 숲길이면 좋겠다 싶었다. 그래서 월정사의 전나무 숲길로 향했다. 사철 푸른 침엽수림에 둘러싸여 고즈넉한 아름다움으로 유명한 월정사는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우리나라 5대 사찰 중 한 곳이다. 손꼽힐 만큼 멋스러운 법당과 신라시대부터 간직해 온 수많은 문화재는 물론 일주문을 지나 나타나는 전나무 숲길은 종교를 떠나 이곳을 방문해야 할 이유로 충분하다.

오대산의 맑은 물줄기를 옆에 끼고 하늘을 향해 쭉쭉 기지개를 켜고 있는 전나무 숲길을 거닌다. 11km 길이의 숲길을 왕복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고작해야 40여 분. 하지만, 까칠하지만 온기를 간직한 황톳길을 맨발로 걷고 있자면 ‘천 년의 숲’이라는 이름의 숲길이 전하는 담백한 위로에 절로 안심하게 된다.

구수한 메밀전병과 쫄깃한 감자떡, 따끈한 옥수수와 칼칼한 황태구이. 강원도 평창이란 단어에 줄줄이 토속적인 먹거리를 떠올리는 것은 비단 식도락가를 자청하는 이들만은 아닐 것이다. 그중에서도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살이 단단해지고, 맛이 더 고소해지는 무지개송어는 이름처럼 맛도 좋은 평창의 별미 중 하나다. 송어는 맑고 찬 물에서 키운 강원도 평창의 양식 송어를 제일로 친다. 붉고 투명한 살은 씹는 맛이 좋아, 주로 회로 즐기는 데 채 썬 채소와 콩가루, 참기름을 더해 초고추장으로 비벼 먹으면 평소 회를 좋아하지 않는 이들도 쉽게 즐길 수 있다. 하루 종일 제법 찬 기운이 묻어나는 바람과 씨름했다면 뜨끈한 매운탕 한 그릇도 놓치지 말 것.

<글. 권혜리 / 사진. 나병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