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0일 일본군 위안부 수요 집회가 열리고 있는 서울의 일본 대사관 앞. 심용석, 백덕열 학생이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께 인사를 드렸다. “잘 다녀오겠습니다. 미국 자전거 횡단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일본군 위안부 인권문제를 알리고 오겠습니다.” 그로부터 보름여 뒤 두 청년은 자전거 페달을 밟은 채 스타트라인에 섰다. LA에서 뉴욕에 이르는 14개 주, 6천여km의 여정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 두 청년은 ‘Triple A Project : Bike for Comfort Women’이란 슬로건을 매단 채 두 달 넘는 긴 도전을 시작했다. ‘트리플A 프로젝트’란 인정(admit), 사과(apologize), 동행(accompany)을 뜻하는 영어 단어의 약자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이 인정하고 사과해야 하며, 이러한 범죄행위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전 세계인이 동행해 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두 청년은 출발 전 또 한 분의 위안부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됐고, LA 글렌데일에 있는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추모식을 올린 뒤 LA를 떠났다. 미국 횡단 일정은 빽빽하게 짜여 있었다. 일본 영사관이나 대사관, 위안부 기림비, 일본 총영사관이 있는 시카고, 워싱턴D.C., 뉴저지, 뉴욕 등 거점마다 수요 집회 계획이 잡혀있었기 때문이다. 최단 거리를 택할 수밖에 없어 주로 고속도로 갓길을 달려야 했다.
“갓길에는 동물들 사체도 많고 터진 타이어나 유리 파편, 철사 등이 많아서 바퀴 펑크만 열 아홉 번 났어요. 큰 트럭이라도 지나다닐라치면 자전거가 심하게 흔들려 위협을 느끼곤 했고요. 가장 힘들었던 건 애팔래치아 산맥을 넘어 워싱턴 메릴랜드까지 갈 때였어요. 가파른 오르막길을 끝없이 올라가야 했으니까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미국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어내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일본 영사관이 있는 시카고 다운타운 근처에서 성명서를 낭독한 뒤 프린트물을 배포했는데 유동인구가 많았지만 누구 하나 관심을 갖는 사람이 없었다.
“다들 자기 삶이 너무 바빠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던 거지요. 그래서 우린 인권문제에 포커스를 맞췄어요. ‘이건 인권침해에 관한 이야기다. 기억해 달라’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죠.”
집회를 할 때는 트리플A의 의미를 소개하고 일본의 사죄를 촉구하는 성명서를 낭독했는데, 행인들의 길을 막지 않고 철저하게 평화적인 시위를 이어갔다. 첫날 글렌데일에서 출정식을 가졌을 때 이들을 주목한 건 한국 언론밖에 없었다. 하지만 미주리 주의 콜롬비아 마을에 갔을 땐 처음으로 외국 언론과 인터뷰를 했고 캔자스, 미주리 지역을 터닝포인트로 해서 트리플A 프로젝트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몇몇 미국 언론의 주목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홍보 방법도 한층 업그레이드됐다.
“함께 트리플A 핸드마크를 한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각자의 SNS에 당신의 생각과 함께 올려달라고 요청했어요. 이렇게 하면 저희가 1명을 만나더라도 그 사람의 페이스북 친구 400~500명이 그 게시물을 볼 거고 그중 1명이 ‘좋아요’를 눌러주면 그 친구의 친구들까지 알게 될 거니까요.”
자전거 횡단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을 접했지만, 필라델피아에서 만난 한 흑인 아주머니의 말이 유독 가슴에 남는다. 꽤 늦은 저녁 시간, 호텔에 도착했지만 숙소 비용이 비싸 망설이고 있었는데 옆에 있던 흑인 아주머니가 ‘LA to NewYork’라는 문구를 보고 무슨 일 때문에 자전거 횡단을 하느냐고 물었다.
“이야기를 듣고 난 아주머니는 눈물을 흘리면서 지갑에서 10불을 꺼내 주셨어요. 자신도 어렸을 때 강간을 당했었다면서 우리를 응원해주고 싶고, 부디 많은 사람들에게 이 문제를 알려달라고 당부하시면서요.”
힘든 과정을 거쳐 마침내 뉴욕에 도착했 때, 심용석 백덕열 학생은 맨해튼에 있는 일본 총영사관을 찾아 위안부 관련 만행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과를 요구하고, 항의서한을 전달했다. 이어 뉴욕 한복판 타임스퀘어에서 ‘For Comfort Women For Human Rights’라고 쓰인 피켓을 뉴요커들 앞에서 펼쳐 들고 횡단 일정을 모두 마무리했다.
이제 한국으로 돌아와 평범한 대학생으로 학업에 몰두하고 있는 두 청년. 이들이 자전거 횡단에 나섰던 이유가 뭘까 궁금했다. 심용석 학생은 오래전부터 책과 블로그 등에서 자전거 횡단 이야기를 접한 후 반드시 도전해봐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소재로 한 ‘소녀이야기’ 애니메이션을 본 뒤 자전거 횡단을 하며 이 문제를 세계에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그래서 독도경비대 후임인 백덕열 학생에게 이를 제안했다.
백덕열 학생은 2012년 런던올림픽 축구경기에서 박종우 선수가 독도세리머니를 했던 것을 인상 깊게 봤다고 한다.
“비록 국제대회에서 제재를 받긴 했지만, 스포츠를 통해서 자기 뜻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란 생각을 하게 됐어요. 용석이가 제안한 것도 마찬가지로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바이크 라이딩이라는 스포츠를 통해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참가하게 됐어요. 특히 지난봄 용석이와 함께 위안부 할머니 댁을 방문하고부터는 그런 결심이 더욱 견고해졌고요.”
일단 마음이 모아졌고 독도경비대를 제대하고 나자 두 사람은 본격적인 준비에 착수했다. 자금을 확보하고자 졸업식을 돌며 꽃다발을 판매해 비행기 왕복 티켓을 확보했고 인천공항 면세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기업과 공익단체, 학교 등에서 협찬과 후원을 받았고 교수님과 친구들도 열렬한 지지자가 되어주었다. 횡단은 날마다 100km를 꾸준히 달려야 하는 일이었기에 체력을 기르는 운동도 꾸준히 했다. 석가탄신일 연휴 때 서울에서 부산까지 종주를 했던 경험은 자신감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뿐만 아니라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미국인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관련 내용을 영어로 외우기도 했다고 한다.
심용석, 백덕열 학생은 그동안 촬영한 자료들을 모아 일본군 위안부 관련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책도 출간할 계획이다. 영상은 12월 10일 세계인권의 날에 맞춰 페이스북에 공개하기로 했다. 두 청년은 청춘의 한 페이지를 ‘일본군 위안부 인권 문제’를 알리는데 할애했지만 저마다 소중한 꿈을 가지고 있었다. 백덕열 학생은 스스로에게 ‘꿈팽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달팽이처럼 느리긴 하지만 꿈을 향해 꾸준히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는 스포츠 에이전트가 되기 위해 하루 30분씩 야구 관련 글을 쓰고 있다. 나중에는 구단을 만들어 야구선수를 꿈꾸는 청소년들이 직접 와서 체험해볼 수 있는 꿈의 구장을 만들고 싶단다.
‘추진력 하나만큼은 최고’라는 심용석 학생은 ‘뒤주에서 인심 난다’는 말처럼 성공한 기업가가 돼서 청소년들을 위한 재단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지금도 조금씩 기부를 하고는 있지만, 제가 여유를 가져야 기부도 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사실 덕열이와 저는 같은 아픔을 갖고 있어요. 둘 다 부모님께서 이혼하셨거든요. 시간이 갈수록 그런 아픔을 가진 아이들이 많아질 텐데 부모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한 청소년들이 어긋나지 않도록 돕는 재단을 만들고 싶어요.”
독도경비대에 입대해 독도를 지키다가 제대하자마자 일본군 위안부 인권피해 문제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6,000km의 미 대륙을 자전거로 멋지게 횡단한 두 청년. 앞으로도 이들이 각자 가진 꾸준함과 추진력으로 자신들의 꿈을 향해 거침없이 질주하길 바래본다.
<글/사진. 기자희, 사진제공.심용석·백덕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