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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공감 | 좌충우돌 남한 적응기

나중에 신문에서 절 보실 겁니다! ‘탈북민 최초 경찰간부로’

5대 기업소, 우리말로 5대 대기업이 몰려있는 함흥. 하지만 전기가 없어 공장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일을 하지 못하고 쉰다는 이곳에서 정훈이(가명)는 군 입대를 2달 남겨둔 지난 2012년 늦가을, 한 달 만에 ‘직행’으로 남한에 왔다. 일반 고등학교에 진학해 ‘스타’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며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고, 지금은 경찰의 꿈을 꾸며 학업에 정진중인 스물세 살의 정훈이를 만나보자.

교실에서 난무하는 영어? 알고 보니 인기 게임용어

남한에 온지 넉 달여 만에 고등학교 2학년이 된 정훈이는 자기소개 시간에 ‘북한에서 왔고 여러분들보다 두 살이 많긴 하지만 그냥 친구처럼 친하게 지내자’고 호기롭게 말했다. 얼마간 학교는 정훈이의 전학 소식에 한바탕 난리가 났다. 쉬는 시간마다 교실 밖 창가에는 ‘누구야? 북한에서 온 학생이 누구야?’하면서 정훈이를 보고 싶어 하는 아이들로 붐볐다.
“첨엔 잔뜩 긴장했죠. 그런데 며칠 지나니까 잠잠해지더라고요. 물론 북한에 대한 궁금증은 계속됐어요. ‘실례가 안 된다면 물어봐도 될까?’ 하면서 거기(북한) 애들은 어떻게 놀아? 게임은 뭐 해? 이런 질문들을 하더라고요.”

정훈이는 한동안 주변 아이들의 이야기를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고 했다. 애들이 마치 영어로 대화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고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다 게임용어더라고요. 롤 원딜, 캐릭터 레벨, 골드 스타 써든 이런 거요.” 북한에 있을 때 남한 드라마 CD 몇 개쯤은 보고 왔다는 학생들이 적지 않은데, 정훈이는 그런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남한 학생들 간의 대화가 더욱 낯설게 느껴졌다.
“북한은 폐쇄돼 있잖아요. 다른 지역으로 이동이 자유롭지 않다 보니 함경남도와 함경북도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요. 함경북도는 중국과 가까우니까 도강도 쉽고 중국을 통해 남한 문화를 접한 사람들이 더러 있지만, 함경남도에서는 ‘중국’이라는 말만 꺼내도 의심의 눈초리로 보거든요. 그래서 사실 남쪽에 친척이 없으면 남한에 올 생각도 못 하고 그래요.”

좀 전에 봤는데 또 ‘안녕?’ 인사, ‘날 놀리나?’

일러스트 이미지정훈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 안팎에서 ‘바른생활 맨’로 불리며 남녀 학생들에게 인기를 얻었다. 아침 7시에 등교, 오후 4시까지 학교 수업, 6시부터 10시까지 야간자율학습을 마친뒤 12시까지 한강변에서 운동을 하는 규칙적인 생활을 반복했다. 북한에서도 운동을 즐겨 했다는 그는 특히 체육시간에 두각을 나타내며 몇 개의 메달과 상장을 받기도 했다. 이런 운동능력과 험상궂게 생긴(?) 얼굴 덕분에 학교 ‘일진’들도 감히 건드릴 생각을 못 했다는 정훈이.

“지금이야 얼굴이 많이 풀렸지만 그땐 긴장도 되고 해서 제 표정이 정말 많이 굳어있었거든요(고등학교 시절 학생증을 꺼내 보여줬다). 그래서인지 절 건드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죠. 한 번은 급식을 먹으려고 다 같이 줄을 서 있는데 건들건들 다니던 아이들이 새치기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너네도 줄 서서 먹어라’고 말해줬죠. 순순히 그렇게 하던데요?(웃음)”

괜히 나섰다간 나쁜 일을 당할 수도 있는데 무섭진 않았냐고 물었더니 자신이 두 살이 더 많은 데다 운동을 잘한다고 소문이 나서 그런지 ‘애들이 깝치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안 싸워봐서 모르지만 적어도 지진 않았을 것 같았다고 했다. 그런데 이런 정훈이 눈에 이상하게 보이는 일이 있었으니, 바로 친구들이 너무 자주 인사를 한다는 것이었다.
“복도에서 마주친 한 여자아이가 ‘안녕?’하며 지나가기에 저도 (손을 작게 흔들며) 안녕~이라고 말해줬어요. 그러다 점심시간에 그 애를 다시 마주쳤는데 또 인사를 해요. 세 번을 봐도 인사를 하고요. 그래서 ‘날 놀리는 건가?’ 생각했죠.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그건 좋아서 그런 거래요. 북한에서는 한두 달 만에 친구를 봐도 그런 인사 안 하거든요. 그런데 남한에선 친구들끼리 ‘안녕?’하며 인사하는 게 신기했어요.”

남한에선 ‘남한여자’를 조심해야 한다?

일러스트 이미지이성에 한창 관심이 많을 나이, 정훈이가 북한을 떠나 처음 타본 중국의 지하철에서 인상 깊게 본 것은 공공장소에서 남녀가 손을 잡고 뽀뽀를 하는 장면이었다. “진짜 충격이었어요. 잘못 봤나 생각했는데 가다 보니 그런 커플이 또 있는 거예요. 뽀뽀하고 껴안는 건 남이 보이지 않는 데서 해야 하는 줄 알았거든요. 신기하다, 19살 때 처음 알았죠.”
북한에선 여자친구가 없었냐고 물었더니, 있긴 있었는데 그건 사귄 거라고 할 수도 없단다. 그러다 다시 곰곰 생각하더니 그래도 손은 잡았으니까 사귄 건 맞는 것 같다며 웃었다.

정훈이는 먼저 남한으로 온 엄마와 이모로부터 평소 ‘남한 여자들을 조심해야 한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왔다. ‘남한 여자들은 북한 여자처럼 고지식하고 참한 여자들이 아니다. 여자 만나면 돈을 쓰게 된다’고 자주 말씀하셨다. 그런데 학교에서 정훈이를 졸졸 따라다니며 유독 잘해주는 여학생들이 있었다. 마치 스타가 된 느낌이 들 정도였지만 엄마 말씀 때문에 ‘사귀고 싶다’는 생각은 못 했단다.
“그래도 그 여자 친구들 덕분에 학교생활 적응이 빨랐던 건 인정해요.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며 도와줬거든요. 걔네들이 하는 것만 따라 해도 배우는 게 많았고요. 지금 한국 여자친구를 사귀고 있는데 남한 문화를 익히는 데 많은 도움을 줘요. 제가 남들보다 빨리 정착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긴 해도 모든 것을 세세하게 다 알지는 못하거든요.”

탈북민과 다문화가정 돌보는 경찰이 될래요!

정훈이는 현재 경찰행정학과에 재학 중이며, 반드시 경찰간부시험에 합격할 거라며 공부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배려자 전형’으로 대학에 입학하긴 했지만, 고등학교 때 ‘미친 듯이’ 책을 읽어 댔기 때문인지 학과 수업을 따라가고 좋은 학점을 받는 데 큰 어려움은 없다고 했다. 함께 대학에 들어온 한 탈북학생의 경우, 수업을 따라가지 못해 두 번이나 휴학한 것과 대조적이다. 정훈이는 경찰간부시험 특채를 보려면 전공과목을 모두 다 들어야 하기 때문에 앞으로 2년 동안은 학과 공부에 열중한 다음, 졸업 후 2~3년가량 본격적으로 시험을 준비할 계획이라고 했다. 치킨집을 경영하며 뒷바라지해주고 있는 엄마도 정훈이의 든든한 지원군이다.

일러스트 이미지“기자님은 앞으로 8년 안에 신문에서 제 인터뷰 기사를 보시게 될 겁니다. ‘남한에 와서 경찰 간부가 된 탈북청년’이라는 제목의 기사요.(웃음) 전 앞으로 경찰 간부가 되면 남한 사회에서 범죄피해를 입은 탈북민이나 다문화 가정에 도움을 드리는 일을 하고 싶어요.”

끝으로, 겨울방학을 맞아 시작한 아르바이트를 하러 떠나는 정훈이에게 ‘올 겨울, 공부 말고 뭘 할 거냐’고 물었더니 스키를 타러 갈 거란다. 그는 ‘남한에 와서 가장 재밌었던 게 바로 스키’였다며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는 그 순간도 시간이 아까울 정도라며 눈을 반짝였다. 그렇다면 북한에 있을 땐 이 무렵 주로 뭘 하고 놀았냐고 물었더니 ‘불장난’이란 답이 돌아왔다.
“강가에서 썰매 타다가 추우면 불을 피워서 함께 놀아요. 나무란 나무는 다 걷어오고 마른 강내댕이(옥수수대)를 모아다가 불을 피운 다음에 그 불 위를 뛰어넘는 장난도 쳤어요. 그러다가 바짓가랑이 다 타기도 하고(웃음), 썰매 타다 젖은 엉덩이 말린다고 불에 갖다 댔다가 막 (옷감이) 녹는 냄새 나고... 아, 옥수수랑 감자를 가끔 구워 먹기도 했었던 것 같아요.”

<글. 기자희>

※ 그동안 ‘좌충우돌 남한 적응기’에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드립니다.
2017년 2월호(49호)부터는 북한이탈주민의 성공적인 남한정착 사례를 보여주는 ‘당신이 통일주인공’ 코너가 게재될 예정입니다.

※ 위 사례에서 소개된 북한의 문화는 북한이탈주민 개인의 경험에 의한 것으로 현재 북한 상황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역과 탈북 연도를 참조해주세요. <나의 살던 고향은>은 북한이탈주민에게 듣는 내고향 이야기입니다.

※ 웹진 <e-행복한통일>에 게재된 내용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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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호 전체 기사 보기 기사발행 : 2016-01-02 / 제4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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