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만난 A학생에게 ‘피곤해 보인다’고 말했더니 ‘간밤에 공부하다 새벽 4시에서야 잠이 들었다’고 말한다. 커피를 마시면 잠이 좀 달아나지 않겠냐는 물음에 아직도 커피는 적응이 덜 됐단다.
“사람들 만나서 담소를 나누거나 스터디할 때 카페 말고 마땅한 공간이 없잖아요. 자연스럽게 커피 문화에 동화될 수밖에 없긴 하지만, 사실 ‘5천 원이면 밥 값인데 이 돈 내고 사먹어야 돼?’ 하는 생각이 들긴 해요. 한국은 아이부터 대학생, 어른들까지 커피를 정말 많이 마시는 것 같아요.”
A학생이 처음 마셔본 커피는 ‘‘에스프레소’다. 친구와 카페에 갔는데 ‘무슨 음료를 마실 거냐’고 묻는 말에 선뜻 답을 하지 못했다. 메뉴판을 아무리 쳐다봐도 모르는 말 밖에 없었기 때문.
“아무거나 마실게.”
“뭘 마실 건지 이야길 해야 주문을 하지.”
하는 수 없이 다시 메뉴판을 보던 중 왠지 맛있을 것 같은 이름 하나를 찾았는데 하필이면 희석시키지 않은 커피 원액 그대로인 ‘에스프레소’를 골랐다.
“어 진짜? 너 에스프레소 좋아하는 거야?”
의외라는 듯 쳐다보는 친구에게 자기도 모르게 ‘응’이라고 답변한 A학생. 얼마 안 있어 ‘주문하신 음료 나왔습니다’라는 말이 들렸고 음료를 찾으러 간 A학생은 그제서야 친구가 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알 수 있었다.
“갔는데 글라스가 안보여요. ‘커피 어딨어요?’ 하고 물었더니 ‘여기 있습니다’라며 조그만 알 잔을 가르키는 거예요. 그것도 딱 절반만 채워져 있고요. ‘어? 나 놀리나?’ 하고 생각했죠.”
그리고 그 조그만 ‘알잔’ 속에 든 쓴 커피맛은 또 한 번 A학생을 충격에 빠트렸다.
“한 모금 마셨는데도 너무 써서 못 먹겠더라고요. 사람들이 ‘커피 커피’ 하기에 처음 커피란 걸 마셔봤는데, 그때 이후로 커피에 대한 환상이 깨졌어요.”
A학생은 당시 할머니와 둘이 생활하면서 보조금을 받았지만, 핸드폰비와 용돈을 벌기 위해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알바 모집’이라는 공고를 보고 들어갔는데 ‘북한에서 왔고 아무 것도 모르는데 배우면서 일하고 싶다’는 A학생의 말에 편의점 주인은 흔쾌히 받아주었다.
“처음에는 누구나 배우면서 일 한다며 격려해주셨는데, 아마 그렇게까지 모를 줄은 모르셨을 거예요.(웃음) 천천히 잘 알려주셨지만 제가 빨리빨리 받아들이지 못해서 손님만 오면 가슴이 벌렁벌렁했던 기억이 나요.”
손님들이 특정 상품이름을 대며 어디에 있냐고 물어볼 땐 ‘잘 모르겠어요. 저쪽에서 찾아보세요’라고 말하기도 했고, 멤버십카드를 일반 신용카드로 착각해 계산하려고 했다가 계속 삑삑 소리만 나 당황하기도 했다.
“제일 난감한 게 담배였어요. 다 영어로 써져 있고, 뒤에 한글 이름이 작게 쓰여 있는데도 너무 생소해서 모르겠는 거예요. 마세(마일드 세븐, 담배 이름) 달라고 하는데 마세가 뭔 줄도 모르겠고 손님이 ‘저거요, 저거’라며 손가락으로 가리켜도 헤매는 거예요.”
편의점을 찾는 손님들도 여러 종류가 있다. 그중에서도 유독 까칠했던 수표 손님, 페트병 아저씨가 오래 기억에 남는다. 어느 날 한 손님이 수표를 가지고 왔는데 A학생은 수표에 대해 미리 주인 아주머니에게 교육을 받았지만 막상 수표를 받아들자 머릿속이 하얘졌다.
“수표를 조회해야 되는데 기억이 안나요. 모르면 전화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전화를 했는데도, 어떻게 물어봐야 할 지 표현이 안돼 땀만 나더라고요. 그때 손님이 무슨 이런 알바를 쓰냐고 주인아주머니께 뭐라고 했었어요.”
진상아저씨 한 분은 페트병에 담긴 맥주를 다 드시고는 빈병을 들고 와서 자꾸 ‘리필’을 해달라고 졸라댔다. A학생은 당시 ‘리필’이란 말을 처음 들었다.
“예? 뭐요?”
“리필 몰라? 리필 달라고.”
알고 보니 아저씨는 알콜중독이었고 가끔 이 편의점에 와서 술을 더 달라며 진상을 피우는 손님이었던 것.
“그 아저씨 보고도 한동안 가슴이 벌렁벌렁했어요. 첨엔 무서워서 경찰을 불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제가 경찰을 불러서 경찰서로 연행돼 가셨던 것도 기억을 못하시더라고요. 맨날 이삼천 원 들고 와서 손 떨면서 술 달라고 하셨는데, 좀 안돼 보여서 여름에 삼각김밥이나 샌드위치 같은 거,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음식들을 가끔 그 아저씨에게 챙겨드리곤 했었어요.”
그렇다면 A학생의 학교생활은 어땠을까? 그는 친구들과 처음 PC방에 갔을 때의 경험을 들려줬다.
“제가 남한에 왔을 때 FIFA나 서든이라는 게임을 많이 하더라고요. 친구들이 PC방에 데려갔는데 전 컴퓨터를 거의 사용할 줄 몰랐거든요. 애들과 어울려야 될 것 같아서 따라 갔는데, 들어가는 순간 라면냄새, 담배냄새 온갖 잡내가 나서 머리가 띵했어요.”
친구들은 A학생에게 게임 계정도 만들어주고, 게임하는 방법도 알려줬지만, 할 줄도 모르고 재미도 없는 데다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키보드를 사용한다는 건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다.
“6시간 정도 PC방에 있었는데 게임 총소리도 시끄럽고, 애들이 막 욕 하면서 게임 하니까 완전 미치겠는 거예요. 나중엔 (게임 속 가상의 적이) 안 죽으니까 저도 모르게 막 욕이 나와요. 친구들이 저보고 북한 욕 알려달라고 했을 땐 욕 못한다고 했는데 말예요.(웃음)”
그런데 그 다음 이야기가 재미 있다.
“그날 시간은 남았는데 게임이 너무 재미없어서 PC방에서 EBS인터넷 강의를 들었어요. 로그인은 할 줄 알았거든요. 그걸 보고 애들이 엄청 충격먹더니 다음부터 안 데리고 가더라고요.”
A학생은 고등학교 입학 초기에 ‘똑같은 한국말을 쓰는데 왜 수업 내용을 알아들을 수 없을까?’ 고민했었다고 한다. 잘 해야겠다는 압박감이 있어서인지 수업시간에 분명 쳐다보며 듣고는 있는데 외국어 듣기평가를 할 때처럼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고민고민 하다가 선생님과 상담을 했더니 선생님은 남한 말에 외래어가 많이 섞여 있고 억양에 차이가 있어서인 것 같다면서 국어 듣기평가용 음성파일들을 건네주셨다.
“mp3 플레이어에 가요파일을 다 지우고 대신 듣기평가 모의 문제 파일을 넣었어요. 당시 소녀시대 노래가 한참 유행할 때였는데 아쉽게도 다 지워야 했죠. 그리고 매일 들으면서 다녔더니 그제서야 들리더라고요. 그 뒤로 A학생은 한국어 듣기평가 문제는 절대 틀리지 않았다고 한다.
A학생에게 앞으로 이루고 싶은 꿈이 뭔지 물었더니 아직 구체적으로 정하진 않았지만, 현재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고 싶다고 했다.
“미래가 불안한 이유는 오늘 준비하지 않아서라고 생각해요. 진로가 아주 구체화되진 않았지만 열심히 내일을 준비하며 노력하면 분명 아름다운 미래가 펼쳐질 거라고 생각해요.”
<글. 기자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