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발 1567m, 천제단이 있는 영봉을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장군봉이, 동쪽으로는 문수봉과 무쇠봉 등이 능선을 이룬 태백산은 영남평야의 젖줄인 낙동강과 민족의 역사와 함께 흐르고 있는 한강, 강원 삼척의 오십천 등의 물줄기가 시작되는 발원지이기도 하다. 그래서 태백산을 떠올리면 ‘시작’이란 단어가 자연스럽게 따라붙는다. 그렇다고 태백산 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시작’만은 아닐 것이다.
유독 눈꽃이 아름다운 겨울날의 태백산은, 산행객과 일반 여행객들이 한 손에 꼽는 겨울 명소이기도 하다. 겨울이면 누구나 한 번쯤은 만나게 되는 설경이 뭐 그리 특별하냐 되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속 깊은 골짜기와 능선마다 소담스레 피어난 눈꽃을 보고 있자면, 일부러 찾아와 산을 오르는 수고스러움 쯤은 대수롭지 않게 느껴질 정도다. 특히 ‘죽어서 천 년, 살아서 천 년’을 간다는 ‘주목’에 하얗게 피어난 눈은 어린 짐승의 연한 털처럼 보드랍게 느껴질 정도다.
우람한 풍채에 비해 비교적 평탄한 등산로를 가졌다 하지만, 눈 덮인 산을 오른다는 것은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다. 헐떡이는 숨소리만이 크게 울릴 정도로 고요하게 가라앉은 길을 오르길 한참, 드디어 ‘민족의 영산(靈山)’이라 불리는 태백산의 실체와 마주하게 된다. 태백산은 예로부터 나라에 중한 일이 있을 때면 ‘왕이 친히 하늘에 제사를 지냈던 곳’인데, 그 제사를 지냈던 신성한 장소가 바로 영봉 정상에 위치한 ‘천제단’이다.
그리고 천제단 앞에서 내려다보는 설경은 감히 어떤 찬사로도 대체 할 수 없을 만큼 신비롭다. 여인의 고운 어깨선을 닮은 봉우리와 등성이를 따라 창백했던 새벽의 푸른빛이 슬렁슬렁 자리를 비워주면, 그 자리 위로 주홍빛 얇은 담요가 켜켜이 쌓이기 시작한다.
‘너는 네 세상 어디에 있느냐? 너에게 주어진 몇몇 해가 지나고 몇몇 날이 지났는데, 그래 너는 네 세상 어디쯤에 와 있느냐’ 문득 주변을 둘러보게 된다. 지금 우리는 어디쯤에 와 있는 것일까. 정답을 알길 없는 질문이 하얀 입김과 함께 뿌옇게 흩어진다.
어렵사리 오른 길, 태백산의 볼거리도 빼놓지 말고 둘러보는 것이 좋겠다. 정상에 오르기 전 쉬어가기 좋은 망경사에는 ‘용정’이라는 샘이 있다. 해발 1470m의 고지대에서 솟아나는 물맛은 국내 100대 명수 중에서도 가장 맛이 좋다고 손꼽힌다. 하산을 할 때는 천제단 아래쪽에 위치한 조선 6대 임금이자 숙부에 의해 유배됐던 단종의 영혼을 위로하기 세워진 단종비각이 있으니 둘러볼 만하다.
태백은 백두대간의 젖줄을 책임지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 중 514km, 한강의 물줄기는 ‘신성한 용이 승천하기 위해 머물렀다’는 전설이 깃든 ‘검룡소’에서 시작된다. 검룡소는 금대봉 골안에 위치하고 있는데, 산세가 험하지 않아 주변 경치를 구경하며 걷기에 좋다. 특히 석회암반을 뚫고 용출되는 물줄기는 곧바로 30여m의 폭포로 이어져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신기한 것은 이곳에서 용출되는 물이 사계절 9도 정도의 온도를 유지한다는 것. 덕분에 흰 눈이 쌓이고 얼기를 반복하는 이 계절에도 암반 주변으로 푸르스름한 물이끼를 볼 수 있다.
구구절절한 민초들의 삶을 보듬으며 1300 리에 달하는 길을 담담히 적시는 낙동강의 발원지 역시 이곳 태백에 있다. 태백 시내 한 가운데에 위치한 ‘황지연못’이 그 곳이다. 100여 m 정도 둘레의 연못은 하루 5,000톤의 물을 용출한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아담한 모양새다. 거창한 모습을 기대했더라면 실망도 컸으리라. 하지만 평범한 도심 공원 속 연못 마냥 평화롭게 주변을 산책하는 이들을 보고 있자니, 이 또한 부족함이 없다 느껴진다.
사실 태백은 도심 자체가 해발 600~700m에 형성되어 있는 도시다. 그렇다 보니 어지간한 장소들에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이란 수식어가 자연스럽게 따라붙는다. 눈발 희끗한 간이역을 상상하고 찾아간 추전역 역시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곳’(855m)에 위치한 역이다. 탄광산업이 발달했던 70년대 무연탄 수송을 목적으로 세워졌던 역은 이제 눈꽃 열차가 쉬어가는 관광명소가 됐다. 하지만 한 여름을 제외하고는 난로를 피워야 할 만큼 기온이 낮은 역사는 도시의 옛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관광객들을 위해 찻집 등 편의시설이 새롭게 자리했지만 여전히 플랫폼에 서서 한때 국내 최장 터널이었던 정암터널로 이어지는 철로를 바라보고 있자면 매캐한 연기를 피어내며 달리던 기차의 요란스러운 기적소리가 들리는 듯싶다. 아마 고단했던 옛 추억들도 그리워지는 계절이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최후의 격전지였던 태백산맥의 한 자락에 위치한 덕분에 태백시 역시 전쟁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무고한 목숨을 잃어야 했던 지역이다. 남겨진 이들은 눈을 감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이 땅을 지키기 위해 애썼던 국군장병과 경찰관, 향토예비군 그리고 청년학도 등의 이름을 잊지 않기 위해 너른 터에 위폐를 모셨다. 바로 연화산 유원지 안에 위치한 충혼탑이 그곳이다.
‘님들이 흘린 그 피 해마다 봄이 되면 피어나리니 먼 산 뻐꾸기가 그날을 말하리 여기 태백의 가족들이 온 정성을 모아 그대들 앞에 큰 꽃을 바치리니 그대들 민족의 등불로 영원히 빛나리’(충혼문 中) 온 세상을 뒤덮는 눈발도 차마 내려앉지 못한 비문의 문구를 오래 되뇌어본다. 우리가 길게 느껴지는 이 계절을 견디고 새로운 계절을 맞아야 할 또 하나의 이유가 그 곳에 있었다.
휘몰아치는 눈발 속에서도 자작나무는 온건했다. 키가 크고 수피가 하얀 나무들이 제 몸을 스쳐지나가는 매몰찬 바람에도 초연한 모습을 보고 있자, 수많은 예술가들이 그토록 자작나무를 예찬한 이유를 알 법도 싶다. 바스락대는 흙을 밟으며, 자작나무 숲 사이를 거닐고 있자면 어디선가 주근깨 가득한 소녀가 뛰쳐나올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워낙 추운지역에서 자라는 수종이라 군락지가 드문 이 자작나무 숲 역시 태백에서 만날 수 있다. 대표적인 곳은 구와우 마을 입구지만, 사실 일부러 찾아갈 필요는 없다. 검룡소를 향하는 길목 등 조금만 주위를 둘러보면 고고한 자태로 서 있는 자작나무를 쉽게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상컨대 어쩌면 새로운 한 해 역시 지나간 시간들처럼 특별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린 또 다시 일상에 지쳐 고장 난 나침반 마냥 자신이 서 있는 위치조차 가늠하기 어려운 날도 있을 것이다. 그럴 때 마다 지금의 ‘시작’에 대해 생각해 보리라. 삶에 거창한 이유나 무리한 노고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저 부족함 없이 지금처럼, 그렇게 흘러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글. 권혜리 / 사진. 나병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