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출발해 중부내륙고속도로로 안동, 점촌 방면으로 빠져나가면 만나게 되는 경북 문경. 그 작은 시내에서도 발그레한 사과를 주렁주렁 짊어진 나무를 사이에 두고 30여 분 더 들어가면 노루목 고개 초입에 닿는다. 그리고 그 곳에서 우뚝 솟아있는 하얀 비석 하나를 볼 수 있다. 1949년 9월 16일 깊은 새벽, 동로지서가 북한 유격대에 의해 피습 당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문경경찰서장을 비롯한 28명이 출동했다. 하지만 현장에 닿기도 전 노루목 고개에 잠복 중인 적들에게 기습당해 경찰서장을 포함한 경찰관 11명과 동로면장, 민간인 2명이 전사한다. 후에 이때 죽은 영령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전공비를 세우는데 이것이 바로 ‘경찰전공비’다. 여름내 잦았던 비 소식 탓일까. 수북이 자란 풀 속에 자리한 전공비의 모습이 쓸쓸하다. 다행이라면 매년 잊지 않고 이곳에서 추모제를 지낸다고 한다. 이왕 옮긴 발걸음이라면 지금의 문경을 지키다 순국하신 분들을 찾아보는 것도 잊지 말자.
요즘 ‘잘 나간다’는 국내관광지에 가면 쉽게 볼 수 있는 레일바이크의 시작은 20여 년 전 석탄을 실어 나르던 철로를 이용한 ‘문경철로자전거’다. 경찰전공비에서 문경새재로 향하다 보면 지나게 되는 진남역사안에서 출발하며 왕복 40여 분간 경북 팔경 중 제1경으로 손꼽히는 진남교반과 문경의 산새를 만끽할 수 있어 추천한다.
또 국내유일의 갱도체험이 가능한 ‘문경석탄박물관’과 ‘운강이강년기념관’도 지척이다. 석탄박물관에서는 석탄의 이해와 석탄산업의 역사, 탄광촌의 이야기 등을 자세히 볼 수 있으며, 실제갱도를 활용한 갱도체험도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이강년기념관에서는 일제를 상대로 구국항일의병을 전개하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한 운강 이강년선생의 자취를 만날 수 있어, 문경뿐 아니라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다양한 역사와 마주할 수 있다.
맨발로 걷는 황톳길은 서늘한 듯 따뜻하고 보드라운 듯 단단하다. 신발 한 짝을 벗어 던졌을 뿐 인데 내내 무거웠던 어깨가 한결 가벼워진다. 문득 깊게 들어 마신 공기가 달다 싶어 주위를 둘러보니 온통 짙푸르다. 대신 양껏 해를 보겠단 욕심에 하늘을 향해 길게 뻗어진 나뭇가지와 잎사귀들의 경쟁에 잠시 하늘은 양보한다.
이곳은 문경새재다. 문경과 충북 괴산을 잇는 새재는 제1관문인 주흘관에서 2관문인 조곡관을 지나 3관문인 조령관까지 이어지는 6.5km의 문자 그대로 고개이며, 길이다. 왕복 4시간 정도가 소요되는 새재의 옛길은 자갈 한 톨 없이 완만하게 보전되어있어, 남녀노소 누구나 걷기 좋은 산책로이기도 하다. 특히 국가 명승으로 지정될 만큼 경관이 뛰어난 데다 임진왜란 당시 신립 장군이 진을 쳤던 이진터를 비롯해 나그네들의 객사였던 조령원터와 주막, 문경새재 아리랑비 등 역사적인 명소들이 곳곳에 자리해 볼거리가 많다.
먼저 관리사무소에서 제1관문인 주흘관으로 향하는 길목에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은 선비상과 임진왜란 당시 순국한 신길원 현감을 추모하는 충렬비다. 그리고 그 뒤로 우리나라 옛길에 대해 알아볼 수 있는 옛길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길은 그저 길이 아니다. 조선팔도 아름다운 옛길의 이야기와 그 안에 녹아있는 문화 그리고 역사까지 길 위에서 볼 수 있다. 옛길박물관 건너편으로는 자연생태공원이 있다. 새재 그 자체가 거대한 생태공원이지만 인공적으로 조성된 생태공원 역시 아기자기한 즐거움이 있다. 오밀조밀 나무 데크로 이어진 산책로 옆으로는 아담한 인공호수가 자리해 산책의 한가로움을 더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주흘관 안쪽으로는 문경새재촬영장이 자리해 발길을 붙잡는다. 이름만 들어도 알법한 사극의 주요촬영지인 오픈세트장은 친숙한 모양새로 관람객들의 사진세례를 받는다. 철저한 고증을 통해 지어진 광화문과 경복궁, 양반집과 서민들의 초가집 마을 등을 서성이다 보면 새재를 넘어 한양으로 먼 길을 나서던 이들의 고단한 삶을 조금은 엿 본 기분이 든다. 촬영장까지 두루 살펴봤다면 본격적으로 길을 걷기 시작한다.
깊은 골짜기에서 출발한 물은 쉼 없이 아래로 흐른다. 막히면 고이고, 고이다 넘치면 다시 흐른다. 그렇게 흐르는 수로와 계곡을 옆에 끼고 겨울 한 철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열려있는 길을 향해 걸어 오르다 슬슬 지겨워 질 때면 온갖 이야깃거리들과 마주하게 된다. 처녀들을 희롱하던 토종물고기가 숨어살던 ‘꾸구리 바위’, 장원급제의 소원을 이뤘다는 ‘책바위’, 소낙비가 이어 준 처녀총각의 러브스토리 ‘바위굴’ 등. 민간설화에 귀를 기울이다 고개를 들면 이번엔 길손들의 숙박을 책임졌다는 ‘조령원터’, 서민들의 애환이 서려있는 ‘주막’, 경상도 관찰사들이 업무를 인수인계했던 ‘교귀정’ 등이 옛 모습 그대로 시야에 들어온다. 특히 평탄하다고는 해도 제법 길을 걷다 만나게 되는 ‘주막’과 ‘교귀정’은 곧장 현대의 길손들에게도 휴식을 제공한다. 주막의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물을 한 모금 마시거나 교귀정의 난간에 기대 저 멀리 산허리에 걸린 구름을 바라보자면 복잡한 일상이 저만치 물러난다. 쉬었으니 이제 다시 걷는다. 황톳길에 고스란히 발자국을 남기며 다시 길을 나선다.
문경의 청정 자연이 잉태한 먹거리는 유독 붉은 빛깔의 것이 많다. 달고 과즙이 많아 일명 ‘꿀사과’로 불리는 문경 가을사과 홍로가 그렇고, 다섯 가지 맛을 지녔다는 오미자의 명성도 전국 최고다. 농산물만이 아니다. 최근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 ‘문경식당’의 고추장삼겹살석쇠구이까지 보태자면 문경의 맛은 ‘붉은색’이 분명한 듯싶다.
문경식당은 문경새재도립공원 주차장 맞은편으로는 자리한 식당 중 끝자락 쯤에 위치해있다. 일대에서 유명한 메뉴는 도토리, 청포, 메밀 등으로 쑨 묵을 조밥과 함께 비벼먹는 ‘묵조밥’과 양념한 삼겹살을 석쇠에서 구워내는 ‘고추장삼겹살석쇠구이’. 문경식당은 그 중 고추장삼겹살석쇠구이와 더덕구이로 유명한 맛 집이다. 화학조미료를 배제한 정갈한 밑반찬과 함께 석쇠 째 식탁으로 옮겨 진 고추장삼겹살구이가 자리하면 입맛부터 다시게 된다. 짜지도 달지도 않은 양념이 골고루 밴 고추장삼겹살은 쫀득한 식감이 일품이며, 여기에 오미자 막걸리 한 잔을 곁들이면 더는 바랄 게 없어진다.
문경은 유독 여자가 많다. 백두대간의 중심인 지리적 위치 덕에 긴 세월 수없이 많은 전쟁을 치러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왜군에 의해, 한국전쟁 당시에는 즉결심판을 받거나 이북으로 쫓겨 가는 북한군에게 잡혀간 이들도 부지기수다.
탄광산업의 부흥으로 남자들이 돌아오면서 성비가 맞춰지기 시작했지만 그전까지만 해도 홀로 남은 여인들이 집을 지켰던 고장이다. 덕분에 지금도 문경 시민이라면 전쟁에 관한 이야기 한 두 개쯤은 어려움 없이 풀어낼 정도다. 그만큼 아직 전쟁의 생채기가 곳곳에 남아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상처는 흉터가 되고 흉터는 남는다. 최근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곳’으로 한 손에 꼽힌다는 문경의 아름다움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 이름 한 줄 남기지 못하고 전쟁 속에 사라진 이들과 그들의 이름을 흉터처럼 가슴에 안고 살아가는 이들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리라.
<글. 권혜리 / 사진. 나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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