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에 정착한지 얼마 안 된 A씨. ‘남들 다 한 장씩은 있는’ 현금 카드를 새로 발급받아 ATM 기기 앞에 섰다. 돈을 인출하려고 기계에 카드를 넣고 비밀번호를 눌렀는데 자꾸 에러메시지만 뜨고 현금 인출이 안 되는 것이다. 당황한 A씨는 격앙된(?) 목소리로 하나센터에 연락해서 도움을 요청했다.
“돈이 필요한데 기계에서 돈이 안 나와요. 비밀번호가 틀렸다고만 하고요.”
“비밀번호를 맞게 누르셨나요? 카드번호와 비밀번호를 일단 불러줘 보세요.”
센터 사회복지사는 비밀번호를 받아 적은 뒤, 은행에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하고 무엇이 문제인지 물었다. 그러자 안내원은 “3회 이상 비밀번호 오류가 있었고 이 때문에 저절로 사용이 중지됐다”며 “은행에 방문해야 해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3회 이상 틀린 적이 없다고 계속 우기는 A씨. 설득 끝에 신분증을 가지고 은행에 방문하기로 했다. 하지만 A씨는 은행에 혼자서 가는 것이 두렵다. 말이 잘 안통하기 때문.
“저기... 제가 은행을 이용해본 경험이 별로 없어서 많이 바쁩니다.”라고 양해를 구한 A씨. 하지만 그의 말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바쁘다는 것은 북한말로 어렵다, 힘들다는 뜻이기 때문에 “은행을 이용하는 게 어렵다, 친절하게 설명해달라”로 바꿔 말할 수 있다.
“탈북하신 분들이 은행에서 업무를 보다보면 가끔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면서 센터로 전화를 해서 창구 직원을 바꿔 줘요. 그러면 은행 직원은 조선족이냐고 되물으세요. 그럴 땐 저희가 북한에서 오신 분이라고 사정 이야기를 하면서 잘 도와드리라고 부탁하곤 해요.”
대화가 잘 통하지 않는 이유는 꼭 남북한간 의미가 서로 다른 단어가 많아서가 아니다. 북한말이 대체로 억양이 강하고 주로 말을 빨리빨리 하기 때문에 못 알아듣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버스를 타고 다시 숙소로 이동하고 하려는 A씨. 은행 근처에 105번 버스가 다니니까 그 버스를 타고 돌아오면 된다고 미리 알아둔 터라, 은행 밖에서 만난 사람들을 붙잡고 물었다.
“근처에 105번이 다닙니까? 어디서 탑니까?”
하지만 모두들 이상하게 쳐다볼 뿐 대답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서 너 사람이 더 지나쳐 가고 어떤 아주머니 한 분이 다행히 105번 버스가 다니는 정류장을 손짓으로 알려주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A씨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을까? 그렇다. A씨는 105번을 ‘백오번’이라고 하지 않고 ‘백공오번’이라고 했던 것이다. 북한 억양이 섞인 말투로 ‘백공오번, 백공오번’ 하니까 사람들이 잘 몰랐던 것. 지하철 타는 곳을 물어봐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북한에서는 지하철을 ‘지철’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대중교통 때문에 많이 힘들어하시지만 나중에는 어느 정도 체념하세요. 하지만 ‘그렇게 빙빙 돌아다녀 봐야 길을 제대로 알지요’라며 긍정적으로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아요.”
이런 사례도 있다. 어느 날 하나원에서 퇴소한 교육생들을 봉고차에 태워 센터로 데리고 왔다. 타는 순서대로 차에 나란히 앉았고 마지막 사람까지 다 탔는데 아무도 차 문을 닫으려고 하지 않았다. ‘문 좀 닫아주세요’라고 말을 해도 누구 하나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나중에 교육생 중 한 분이 이렇게 말하셨어요. 차에 탔으면 차 문을 닫는 게 기본인데, 그것 조차 몰랐다는 것에 괴리감이 느껴져 조금 우울 했었다고요. 하지만 지금은 괜찮다고 웃으며 말씀하시더라고요.”
TV 드라마나 연예프로그램을 즐겨보던 B씨. 어느 날 B씨가 센터에 전화를 했다.
“친구 집에서는 재미있는 프로그램, 재방송하는 프로그램 나오는 텔레비전 통로(TV 채널)가 많던데 왜 우리집은 몇 개 안 나와요?”
센터에서는 기본 채널과 케이블방송 채널에 대해 설명하며 별도로 가입을 하고 요금을 조금 더 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제야 이해한 B씨는 케이블TV를 설치했다. 하지만 또 다시 센터에 전화를 건 B씨.
“그런데 왜 친구 집에는 **방송이 나오는데 우리집에는 **방송이 안 나와요?”라고 따져 물었다. 채널지정을 할 때 센터에서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는데도 보고 싶은 채널이 안 나온다고, 돈도 더 냈는데 왜 안 나오냐고 항의한 것. 센터에서는 케이블방송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 설명해서 TV채널을 변경해주기도 했다고 한다.
인터넷 사용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대부분 원하는 검색어를 치고 클릭해서 보는 수준이라고 한다.
“하루는 가정 방문 갔는데 저를 보더니 너무 반가워하는 거예요.
고용노동부에서 지원하는 내일배움카드나 취업성공패키지 같은 프로그램에
참여하려면 신청도 해야 하고 회원가입도해야 하는데, 자꾸 뭘
설치하라고만 한다며 몇 시간 째 쩔쩔매고 계셨다고 하더라고요.”
SNS의 경우 북한이탈주민들은 주로 페이스북 보다는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를 많이 사용한다고 한다.
여행의 자유가 없는 북한에서 살다보니 여행을 다니는
걸 좋아해서 사진을 자주 SNS에 올리곤 하는데,
센터에서는 그걸로 근황을 아는 경우가 많다며
반기고 있었다.
북한에서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C씨. 롯데월드에 갔는데 너무 화려하고 신기한 것들이 많아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으며 돌아다니다 보니 일행을 놓치고 말았다. 센터 관계자에게 전화를 걸긴 했는데...
“지금 어디에 계세요?”
센터 관계자가 C씨에게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려달라고 하자 갑자기 난감해 졌다.
“관성열차가 옆에 있어요.”
“네?”
“옆에 빨간색 풍선들이 많아요.”
“네?”
설명을 해도 센터 관계자가 잘 알아듣지 못하자 급당황하며 말문이 막힌 C씨. C씨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북한말로 관성열차는 롤러코스터를 말하는 것이고 빨간색 풍선이 많다는 것은 풍선을 파는 가게 옆이라는 뜻이다. 즉 롤러코스터 옆 풍선가게에 있었던 것이다. 북한이탈주민의 경우 길을 잃어버리면 주변을 둘러봐도 익숙한 것이 별로 없기 때문에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다행이 금방 일행과 합류한 C씨. 그때 갑자기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가는 곳이 있었다. 아이스링크였는데 이곳은 북한에서 인기 있었던 남한 드라마 ‘천국의 계단’에서 권상우가 부메랑을 던지며 ‘사랑은 돌아오는 거야’라고 외친 곳이다. 사람들인 드라마에 나왔던 곳이 저곳이냐고 물으며 모두들 사진 찍기에 바쁘다고 한다. 하지만 드라마 ‘천국의 계단’이 나은 부작용도 있다.
“드라마에서 보면 한국의 집은 대부분 크고 정원 딸린 주택들이 나오는데 임대주택은 왜 이렇게 작아요?”라고 묻는 다는 것. 드라마뿐 아니라 인구밀도가 적은 북한에서는 남한처럼 오밀조밀 살지 않기 때문에 임대아파트가 작게 느껴진다고 한다.
“사실 그 말은 매 기수마다 듣긴 하는데, 나중에는 좋아하세요. 청소하기 편하다고. 물론 가족들이 많지 않은 경우에는요.”
또 한 가지 드라마의 부작용이라면 바로 옛날 유행어를 쓴다는 것. 북한이나 중국에서 체류하면서 보는 드라마는 주로 몇 년 전에 유행했던 드라마다 보니 지금은 남한에서 잘 안 쓰는 말을 ‘요즘 젊은 사람들 말’이라고 생각해서 쓰시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한다.
<글. 기자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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