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비포장도로였다는 이곳 장남면(경기도 연천군). 80% 이상이 인삼농사를 짓고 사는 이 마을에 첫발을 디뎠을 때, 먼저 반긴 건 땅을 울리는 포 훈련소리였다. 마을 사람들은 “어휴, 우린 매일 같이 들리는 대북방송도 자장가 같은데 뭘”이라며 껄껄 웃지만, 정작 도발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내 밭에 고추 따러 가지도 못할 만큼’ 불편한 세월을 반세기 이상 겪어왔다. 마을 공터마다 심어놓은 해바라기가 태양빛을 받아 하나둘 꽃망울을 터뜨리던 날, 누구보다 더 통일을 바라는 장남면 주민들이 ‘통일바라기축제(8월 12~21일)’를 주제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e-행복한 통일 : 장남면으로 오는 길은 자유로가 시원하게 뚫려서 좋은데, 막상 와 보니 대포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안덕현 자치위원장 : 포 쏘는 소리는 미군 훈련장에서 나는 거야. 호로고루성(고구려 유적지) 바로 맞은편 강 건너에 훈련장이 있거든. 북한에서 쏘는 소린 줄 알았어? (웃음) 북한하고 가깝긴 하지. 장남면 소재지에서 개성까지 26~27km밖에 안 되니. 여기서 개성 송악산도 보여.
이용환 간사 : 가을 되면 북쪽에서 DMZ 안 갈대밭에 불을 놔요. 갈대가 시야를 가리거든요. 그러면 밤에 저 능선으로 뻘건 불빛이 막 보이고 꺼먼 재가 이 동네까지 날아와요. 대남방송도 쩌렁쩌렁 들리고요.
유병호 축제위원장 : 시야가 가리는 건 우리도 마찬가지니, 같이 맞불을 놓긴 하죠. 그 옆에서 소방관들이 불 끄러 대기하고 있고.
곽혜숙 부위원장 : 지금도 새벽 5시쯤 들에 나가 일하다 보면 대남방송 나와. TV에서 북한이 뭐 했네 하면 시내 사람들이 막 연락을 하지. 전쟁 나는 거 아니냐고, 거기는 괜찮냐고. 그런데 우린 그냥 우리 할 일 해.
안덕현 자치위원장 : 그전엔 비방하는 내용으로 방송을 많이 했는데 요샌 그거 별로 안 하고 자기 자랑을 많이 하는 거 같어요. 옛날엔 소리도 컸는데 지금은 강 건너에서 방송하듯이 작게 들리고.
이용환 간사 : 불온선전문도 많았잖아요. 초등학교 때는 하도 많이 떨어지니까 100장 주워가면 도화지 1장이랑 바꿔주곤 했었는데. 지금도 가끔 비닐풍선 타고 떨어지긴 해요.
e-행복한 통일 : 마을에 와 보니까 남북한이 지금 대치 중이란 게 생생하게 느껴져요. 그런 장남면에서 ‘통일바라기축제’를 한다니까 더욱 의미가 있는 것 같은데, 축제에 대해 소개 해주세요.
이용환 간사 : 마을에 해바라기를 심은 건 원당2리 이장님이 마을에서 젊은이들끼리 꽃을 한 번 심어보자고 해서 하게 된 건데, 꽃이 피니까 동네에 웃음꽃이 피어나고 좋더라고요. 그래서 마을 전체에 심어보자고 했다가, 호로고루 성지를 해바라기공원으로 만들어보잔 아이디어가 나왔죠.
안덕현 자치위원장 : 어휴. 그런데 만 평 정도 되는 호로고루 성터가 옛날에는 돼지풀, 잡풀 투성이였어. 그걸 해바라기공원으로 만들려고 하니 좀 힘든 게 아냐. 또 돌은 어찌나 많던지, 돌 빼낸 거 그 옆에 다 쌓아놨어, 증거품으로 다. 장병들이 도와줘서 함께 작업했지.
이용환 간사 : 여기 호로고루성은 고려 요충지였어요. 강 수심이 얕아 북한에 걸어서 갈 수 있었으니까요. 6.25 때도 그쪽으로 다 도강했다고들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LH공사 여직원분이 그 호로고루성 위에 올라 멀리 바라보더니 ‘여긴 북한과 가까우니까 통일바라기라는 이름이 좋겠다’고 아이디어를 내줬어요. 공원을 가꾸다 보니까 점점 예뻐지고, 지역경관도 괜찮아서 위원장님이 축제를 열어보자고 하셨죠.
안덕현 자치위원장 : 그런데 여기로 6.25 때 탱크가 도하하다 보니까, 못 오도록 성 바로 옆 1만 평 넘는 곳에 지뢰를 매설했어. 주민들 70~80% 동의서 받고 건의서 올려서 이제 지뢰제거사업이 거의 확정됐지. 장남면 최고 숙원 사업이 지뢰제거사업이거든. 통일바라기 공원과 연계해서 내년부터는 제거사업이 시작될 수 있을 거야.
이용환 간사 : 게다가 장남면은 6년근 고려인삼 주산지인데, 이 고려인삼이란 게 개성인삼 씨를 6.25 때 가지고 내려온 거거든요. 인삼 판로가 마땅치 않은데 ‘통일바라기’ 축제를 하면서 함께 홍보할 수 있으면 좋죠.
e-행복한 통일 : 올해가 3회째 열리는 축제인데, 준비는 많이 하셨나요?
안덕현 자치위원장 : 사실 1회 때는 해바라기에 대한 지식이 없었어. 작은 모종을 내야 했는데 너무 큰 모종을 냈고 날이 가물어서 절반은 죽었거든. 작년 2회 때는 해바라기가 만개한 다음에 축제를 열다 보니 꽃이 다 져버렸지. 그래서 이번엔 광복절에 맞춰 8월 12일부터 15일까지 4일간 중점적으로 행사나 공연을 하고, 21일까지는 방문객을 위주로 해서 해바라기 공원으로 안내하려고 해요.
곽혜숙 부위원장 : 맨 처음에 할 때는 먹고 사는 것만 신경 쓰느라고 같이 일 좀 하자고 해도 안 나왔어요. ‘바빠 죽겠는데 누가 풀 뽑고 해바라기 모 심고 하겠어?’라고 생각한 거지. 자치위원회에서 품 팔아가지고, 아주머니들은 김매고 남자들은 풀 깎고 질통 메고 약 줘가면서 직접 다 하려니 힘들었죠. 그런데 이번에 보니까 나 정말 놀랐어. 50명이 나왔다니까. 새벽 5시부터 점심 무렵까지 밥 안 먹고 나와서 만 평을 작업했어요. 그렇게 참여도가 좋은 거 보면 생각이 많이 달라진 걸 알 수 있다니깐.
유병호 축제위원장 : 첨엔 자치위원들 위주로 했는데 요번에는 동네사람, 면사무소 직원들까지 다 나왔더라고요. 성터 말고 사미천교나 요기 들어오는 관문까지 다 심었지 뭐. ‘해 주십시오’ 안 해도 어르신들이 스스로 먼저 와서 다 심었더라고요.
이용환 간사 : 우리는 주민 스스로 다 하는 거예요. 지원받는 건 오직 무대장치와 몽골텐트 밖에 없어요. 예산이 없으니까 아이디어는 많지만 정작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긴 해요. 앞으로 점점 더 키워나갈 계획이에요.
안덕현 자치위원장 : 애로사항이 많지. 탈북민이나 이북5도민들도 초청하고 싶은데 그러려면 돈이 들어가고, 유적지니까 문화재 관리법에 저촉되기 때문에 맘대로 할 수 없단 말야. 통일사생대회나 통일소원리본 매달기는 할 거고, 풍선아트도 직접 해보려고 주민들이 강사 불러다 배웠어. 통일미래센터가 인근에 있으니 청소년들이 교육 오면 이쪽에 방문할 수 있게끔 해달라고 부탁도 해놨고.
이용환 간사 : 스페인 안달루시아 해바라기밭처럼 예쁘게 꾸미고 싶고, 함안의 강주마을처럼 유명한 축제로 키우고 싶은 욕심은 있어요. SNS를 통해 계속 홍보하고 있는데 청정지역이고 안보관광지도 많으니까 점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을까요?
e-행복한 통일 : ‘통일바라기’ 마을인데, 통일이야기를 안 하면 서운하시겠죠?
이용환 간사 : 저는 통일도 통일이지만 그 전에 도발 좀 안 했으면 좋겠어요. 그것 때문에 손해가 엄청나요. 진짜 한 몇십 억 ‘까지는’ 느낌이에요.
안덕현 자치위원장 : 가장 긴박했던 게, 작년에 태풍전망대 근처 중면 마을 면사무소에 포탄이 떨어졌을 때지. 고사포 포격으로 주민대피령이 내려서 요 밑 방공호에 주민들이 집결했던 게 가장 최근 기억이야. 그런 적이 별로 없었는데.
유병호 축제위원장 : 8월이면 고추도 따야 하고 그 시기에 해야 할 일들이 있는데 농사꾼들까지도 못 들어가게 하니까… 한 일주일 못 들어가게 되면 고추가 다 떨어져 버리거든요.
곽혜숙 부위원장 : 그러니까 우리는 통일이 더 필요해. 여기는 생계가 농사이고 전방에 농토가 많은데 못 들어가게 하면 얼마나 애가 타겠어?
안덕현 자치위원장 : 외지 사람들이 임진강 주변에서 살고 싶은데 군사시설 보호지역이어서 집을 지을 수가 없다 보니 불법 콘테이너나 하우스를 지어놓고 살아. 옛날에는 여기에 고란포구가 있어 화신백화점도 있고 나름 중심지였는데….
이용환 간사 : (주민들을 향해) 그런데, 장남면 사람들이 통일해바라기를 심고 축제도 하는데 이걸 북한에서 알까요? 접경지역에서 어렵게 사는 우리가 해바라기까지 심었잖아요.
곽혜숙 부위원장 : 어휴, 그렇게 이해를 잘 해주는 사람 같으면 이렇게 하겠어?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웃음).
이용환 간사 : 아니 딸내미가 그러더라고요. ‘통일공원에 해바라기를 심어놓은 걸 북한에서 알면 통일이 좀 더 빨리 되지 않을까요?’라고요. (웃음)
곽혜숙 부위원장 : 해바라기 심은 건 몰라도, 남한 역시 통일을 바란다는 걸 북한 주민들도 알긴 알 거야. 그 사람들 마음에 사랑을 심어줘야 해. 녹이는 건 사랑밖에 없으니까. 근데 기자 양반, 우리 세대에 통일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e-행복한 통일 : 그걸 저에게 물어보시면…. (땀 뻘뻘)
안덕현 자치위원장 : 사실 이게 공상인가 망상인가 하는 생각이 들긴 해. 너무 막연해서 내 생전에 통일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 그래도 가끔은 통일이 돼서 번성했던 그 시절이 다시 돌아오는 상상을 하긴 해. 마포 나룻배랑 인천 새우젓배가 들어왔다가 장단콩 싣고 나가던 그때보다 훨씬 좋아질 거 아냐, 통일이 되면…. 그런 세상을 후손에게 물려줘야 하는데, 꼭 그렇게 됐으면 좋겠어.
<글.사진 / 기자희, 사진공모전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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