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레말큰사전 편찬사업을 대표하는 인물이기 이전에 반세기 이상 시를 써온 시인으로 국내외에 잘 알려진 고은 이사장(82). ‘詩를 쓴 것이 아니라 詩를 살았다’고 평가되는 그가 남긴 150여 편의 저서들은 격동의 한국 현대사 곳곳에 알알이 박혀 별처럼 빛을 발해 왔다. “언어 없는 시대(일제 시대)에 태어나서 언어를 가지고 이제껏 살아왔으니, 모국어에 대한 보답을 하고 싶다”는 고은 이사장은 겨레말큰사전 편찬사업을 개인적으로는 ‘마지막까지 안고 갈 임종사업’이라고 표현했다.
고은 이사장은 겨레말큰사전 공동편찬 사업에 대해 소개하기 전에 우리 모국어가 가진 ‘고난의 역사’ 이야기부터 들려주었다.
“우리 현대사에 있어 20세기 전반은 식민지시대였고, 후반은 ‘해방’이 ‘분단’이라는 말과 동의어가 된 시대였지요. 식민지시대는 우리 모국어, 우리 삶의 실체가 부정당하는 시대였고, 해방 이후 비로소 ‘우리의 모국어로, 우리의 삶을 살아보자’ 했을 때 다시 분단을 맞게 된 거지요.”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분단 상태가 몇 십 년 더 지속될 경우 남북한 주민들 끼리도 통역 없이는 대화하기가 힘들 정도로 언어가 이질화될 수 있다는 점이라고 했다.
“70여년 전 두 언어가 갈라져버렸고, 다른 길을 가기 시작했어요. 더욱이 북한의 표준어인 문화어(文化語)는 북한 체제의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많이 달라졌지요. 물론 북한 사전에는 옛날 모국어가 많이 들어있다는 장점도 있지만요.”
남한의 경우 북한처럼 체제의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각 지역의 언어들이 ‘서울 종로를 비롯한 사대문 안에 사는 중산층의 언어’인 표준어에 의해 통합돼 버린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고 했다. 예를 들어 뉴욕과 같은 ‘항구’였던 서울 마포일대는 언어가 매우 다채롭고 화려했지만, 종로나 북촌 등에서 쓰는 언어에 밀려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국어의 소멸은 남북한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고은 이사장은 우리 조상들이 중국,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중앙아시아로 이주할 때 모국어를 가지고 갔지만, 2~3세로 이어지면서 점차 우리 언어가 자취를 감추고 있다며 우려했다. 또한 ‘모국어’의 의미는 민족사회의 지역어를 아우르는 개념이라고도 말했다.
겨레말큰사전 공동편찬 사업은 남북의 언어 동질성 회복과 겨레말 통합, 통일준비를 위해 남·북·해외의 언어를 단일 사전에 수록하는 남북 공동사업이다. 2004년 이에 대한 남북 간 합의가 있었고 2007년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법이 제정됐으며 매 분기별 공동회의를 개최해왔으나 2010년 중단됐다. 2013년에 근거법이 개정돼 당초 2014년 4월까지이던 사업기간이 2019년 4월까지 연장됐고, 지난해 사업이 재개되어 10월 말 평양에서 편찬위원회 회의가 열렸다.
“이 법이 제정될 당시 국회에서 거의 만장일치로 이 사업에 대해 찬성을 했고, 위기가 있긴 했지만 국민들의 기대 속에서 다행히 지속되었습니다. 그리고 작년에 사업기한이 끝났는데도 다시 연장을 해주었지요. 사전은 지금 70%가량 진행되었습니다.”
사전을 만드는 작업은 남북 간 합의를 이루는 ‘통합의 작업’이다. 일사천리로, 일방적으로 술술 풀어나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편찬위원회가 만나면 악수만 하는 게 아닙니다. 이 단어를 사전에 등재하느냐 마느냐 한바탕 격렬한 싸움을 하고 다시 타협하는 일의 연속인 거지요.”
회의 개최 장소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서울이 남한을 상징하듯, 평양은 북한을 상징하기 때문에 평양에서 열린 이번 회의에 고은 이사장은 참석하지 않았다.
“일은 남북한의 전문가, 학자들이 하기 때문에 그 분들의 노고가 많지요. 저는 남북을 통합하는 위치, 양쪽 편찬위원장 간 균형을 유지하는 상징적인 존재라고 생각해요. 중심을 잡고 이들 뒤에 같이 서 있는 것이지요. 2~3월중 예정된 회의는 개성에서 열릴 것이고, 그때는 저도 동행할 계획입니다.”
고은 이사장은 사전이 완성된다고 해도 남북공동편찬위원회가 이번으로 끝나지 않고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온전한 사전, 결점 없는 사전은 없어요. 그래서 ‘가장 진화된 사전’을 목표로 하고 있지요. 편찬위원회가 끊임없이 지속돼서 일정기간이 지나면 언어를 다시 올리고, 필요 없는 낱말은 빼는 등, 사전은 늘 새롭게 다듬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겨레말큰사전은 남북통일에 어떤 의미가 될 수 있을까? 고은 이사장은 “남북한간 언어를 통합해 놓는 작업은 통일을 앞당기는 행위이기도 하고, 통일 이후에는 통일을 시작하는 하나의 원리가 되기도 할 것”이라고 말한다.
“언어가 삶의 형식을 송두리째 바꿀 수는 없지요. 다만 이 작업이 통일에 다가가는 하나의 작용을 할 것이라는 것만은 확신해요. 통일된 이후에 그때 부랴부랴 언어를 통합하려고 하면 시끄러워집니다. 언어의 통합 없이 다른 통합은 불가능하지요. 모든 일은 언어에서 시작됩니다. 결혼해서 첫날밤 지낼 때도 여보 당신, 하는 말부터 시작하잖아요(웃음).”
통일 언어는 이전에 있던 언어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새로운 통일시대’의 ‘새로운 언어’가 될 것이다. 고은 이사장은 잃어버렸던 언어들을 모아두는 데서 끝나지 않고, 언어의 힘에 의해서 새로운 언어생활을 열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한다.
남북통일도 ‘과거로 복귀’는 아니라고 했다. 70년 분단을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는 일이 아니라, 한반도 몇 천 년의 역사를 가름할 새로운 통일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지금의 분단이 ‘남북조시대의 연장’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는 신라가 통일을 했다고 해도 고구려가 있던 자리에 발해가 있었기 때문에 한반도는 당시에도 여전히 분단되어 있었고, 이후 세종대왕이 압록강 토문강으로 영토를 확장했지만 지금은 그 통합공간조차 깨져버렸다며 ‘재통일’이 아닌 ‘신통일’이 필요할 때라고 강조했다.
또한 독일통일은 베를린장벽이 무너지면서 시작됐지만 그 전에 브란트의 동방정책이라는 기나긴 과정이 있었던 것을 예로 들며, 우리의 통일은 점(點)과 같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아주 긴 선(線)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통일 과정을 선으로 보면, 통일은 자연(自然)이 된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되풀이되고 또 되풀이되는, ‘자연을 닮은 통일’을 이뤄냈을 때 어느 한 쪽에 상처를 주지 않은 행복한 통일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통일’을 넘어선 ‘통합’, ‘질적인 통일’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글. 기자희 / 사진. 나병필,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