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명한 쪽빛하늘 아래 드러난 홍천의 첫 얼굴은 단정했다. 알음알음 입소문을 듣고 발길을 옮기는 여행객들이 적지 않은 곳이지만 들뜨고 소란스러운 느낌보다 단정하고 차분한 분위기다. 오랜 세월, 수많은 역사의 현장과 마주했던 고장은 작은 일에 소란 떠는 법을 배우지 않았다. 긴 역사에 비해 홍성이란 이름이 친숙치 않은 까닭은 홍주군과 결성군이 합쳐지면서 생겨난 지명이기 때문이다. 홍성의 이야기를 하자면 홍주성을 빼놓을 수 없다. 열여섯 차례에 걸친 왜구의 침입, 고려 중기 문신 최향의 반란, 이몽학의 반란, 동학농민운동과 의병전쟁으로 일컬어지는 수많은 전쟁을 치러낸 곳이 바로 홍주성이다.
지금은 비록 홍주성벽 일부와 홍주아문 그리고 홍주성의 동문인 조양문만 남아있지만 역사의 흔적을 발견하기에 부족함은 없다. 특히 조양문은 을사조약에 반대한 의병군이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 장소이기도 하다. 또 당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수백 명의 시신을 수습해 합장한 곳이 홍주의사총이다.
홍성까지 발걸음을 옮겼다면 잔잔히 흐르는 홍성천을 앞에 두고 긴 세월 임시매장되었던 의병들의 넋이 휴식을 취하고 있는 홍주의사총에 들러 순국선열을 기리는 묵념의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의사총 뒤쪽으로는 올 초 세워진 홍주의병기념탑도 있으니 놓치지 말자. 고려 말 세워진 것으로 유추되는 홍주향교도 지척이다.
홍성을 둘러보다 보면 유난히 기념관과 위인들의 이름을 딴 유적지가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긴 세월 의기 높은 위인들 역시 여럿 배출한 곳이기 때문이다. 시간만 허락한다면 작정하고 순국열사들의 흔적만 찾아 떠나는 여행을 해도 좋을 정도다. 특히 백야 김좌진 장군과 만해 한용운 선생 관련 유적지만은 놓치지 말자. 먼저 일제강점기 시대 독립군을 조직해 무장투쟁을 펼쳤으며, 그 중에서도 유명한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던 김좌진 장군 생가지는 서해안고속도로 홍성 IC로 나가면 쉽게 찾을 수 있다. 생가지는 출입문 왼쪽으로 생가가, 오른편에는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기념관에서는 전문 문화관광해설사의 설명으로 장군의 일대기를 들을 수 있다.
또 뒤를 둘러싼 야산 자락 안쪽으로 장군의 넋을 기리는 사당이 있으며 기념관 뒤쪽으로 난 길을 차분히 오르면 김좌진 장군의 일생을 동상과 조각으로 표현한 백야공원도 둘러볼 수 있다. 공원에는 휴식공간도 잘 조성되어 있어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나라를 위해 할 일을 다 마치지 못함을 한탄했다는 장군의 애국심과 기백을 느끼며 잠시 쉬어가도 좋다.
김좌진 생가지의 앞길을 따라 남쪽으로 10여 분 남짓 달리면 또 한 분의 민족의 영웅을 만날 수 있다. 바로 만해 한용운 선생이다. 선생은 3.1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으로 주도적인 활동을 했으며, 불교의 대중화를 이끈 승려이자, 한국 문학사에 남을 근대적인 저항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생가지에는 초가지붕과 우물터가 정겨운 생가가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선생의 철학을 반영한 60여 점의 유물이 전시된 만해문학체험관도 관람할 수 있다. 또 체험관 뒤쪽으로 난 계단을 오르면 선생의 대표작 중 하나인 ‘복종’을 비롯한 민족시인 20인의 시와 어록을 자연석에 새겨 넣은 민족시비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시라고 해서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다. 오롯이 난 소나무 숲길을 따라 걸으며 애국심이 담긴 시와 어록을 읽고 있자면 절로 머리가 아닌 가슴 한 쪽이 뜨거워진다.
위인들의 애국심에 뜨거워진 가슴을 안고 이번에는 가을 포구로 향한다. 서해안 포구의 매력을 제대로 만끽하고 싶다면 제법 바람이 쌀쌀한 이맘때가 적기다. 천수만 해안도로를 시원스레 내달리다 보면 초입에서 조류탐사과학관부터 만나게 된다.
매년 천수만을 거치는 철새는 천연기념물, 멸종위기종 등을 포함해 265종이나 된다. 아이들과 함께 나선 여행길이라면 과학관 영상실에서 상영하는 ‘철새들의 비상’을 추천한다.
과학관을 잠시 둘러봤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서해 바다를 만끽할 차례다. 바다를 옆에 끼고 이어지는 드라이브 코스를 따라 남쪽으로 달리다보면 궁리포구를 시작으로 속동전망대, 남당항 등을 두루 둘러볼 수 있다. 현대적으로 꾸며진 대형포구가 아닌 소박하고 정겨운 포구는 서해안의 늦가을이 여물수록 그 풍취가 짙다. 특히 속동전망대에서 만나는 해질녘 풍경은 특별하다. 질펀한 속살을 드러냈던 갯벌위로 짠 내 가득한 물이 차오르면 낮 동안의 외출을 마친 태양이 제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한다. 청명한 쪽빛하늘도 드넓은 들녘도 온통 발그레 홍조를 띄다 이내 뉘엿뉘엿 바다가 해를 삼켜낸다. 이른 아침부터 재촉한 발걸음의 수고가 이 웅장한 자연의 순리로 보상받는 순간이다.
소박한 포구와 그 곁으로 펼쳐진 가을 들녘을 바라보며 한 숨 돌리고 있자면 슬슬 출출해진다.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오게 만든다’는 전어, 살집 오른 꽃게 등 지금 서해안의 바다는 건져 올리는 족족 풍성한 밥상이 된다. 특히 천수만에서 가장 가까운 뭍인 남당항은 싱싱한 대하를 맛보기에 최적의 장소다.
가을 제철을 맞은 남당항의 대하는 육질이 쫄깃하고 맛이 달기로 유명하다. 워낙 해산물이 유명한 포구다 보니 바다를 앞에 두고 오밀조밀 횟집들이 붙어있다. 그중 서해안 횟집은 10여 년 간 같은 자리를 지켜 온 맛 집이다. 조리 직전까지 살아서 파닥대는 새우는 생으로 초장에 찍어 먹으면 달큰한 맛이 일품이고, 굵은 소금위에 구워내면 그 고소한 맛에 손과 입이 쉴 시간이 없다.
또 제철 맞은 전어 역시 잊으면 섭섭하다. 살이 제대로 오른 전어 한 점을 쌈 위에 올려 마늘, 고추, 쌈장과 함께 한입 가득 씹으면 그 고소함에 절로 웃음이 난다. 그렇게 새우와 전어로 입맛을 돋웠다면 마무리는 해물칼국수를 추천한다. 삼삼한 국물과 쫄깃한 면발이 뱃속을 든든하게 채워준다.
<글. 권혜리 / 사진. 나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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