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시대

vol 120 | 20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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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징비록(懲毖錄)>

잔인한 왜군, 포악한 명나라군 사이에서
조선을 ‘간신히’ 지킨 류성룡의 피울움

이순신을 천거해 나라를 구한 류성룡 초상화.이순신을 천거해 나라를 구한 류성룡 초상화.

북한의 핵과 미사일을 머리에 이고 살게 됐음에도, 중국의 압박을 두 눈으로 보고 살게 됐음에도 내 땅에는 사드를 배치하면 안 된다는 님비 현상을 벗지 못하는 우리는 <징비록(懲毖錄)>을 다시 읽어야 한다.


핵을 머리 위에 이고 살아야 하는 우리는 가공할 만한 사태의 심각성에 둔감한 것 같다. 북한은 5차 핵실험에 이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개발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바닷속 잠수함이나 터널, 열차 등 언제 어디서 쏠지 모르는 비대칭적 공격이므로 <손자병법>에 따르면 ‘부지피부지기 매전필태(不知彼不知己 每戰必殆, 적의 실정은 물론 아군의 전력까지 모르고 싸운다면 싸울 때마다 반드시 패한다)’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설마주의’에 빠져 있다. 또 ‘누군가(미국, 중국)가 지켜줄 것이다’라는 사대주의도 팽배하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지도층의 도덕적 의무) 정신도 실종됐다. 내 뒷마당에는 사드 등 군사시설을 절대 배치할 수 없다는 님비 현상도 만연해 있다. 북한의 핵 개발 목표는 적화통일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영국 총리 처칠은 “평화는 공포의 자식”이라고 했다. 평화를 원한다면 죽음을 무릅쓰고 극한 상황에 대처해야 한다는 뜻이다.

국가 안위에 대한 오판은 상상 이상의 참혹한 결과를 불러온다. 1592년 임진왜란 발발 전에 통신사로 일본에 간 황윤길(서인)과 부사 김성일(동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명가도(征明假道, 명나라를 치러 가는 길을 빌려달라)’ 요청을 놓고 당파적 시각에서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가 미증유의 참상을 불러일으켰다. 국토는 쑥대밭이 됐고, 피가 냇물처럼 흐르는 대참극이 벌어졌다.

오늘날 실질적으로 북핵을 제어할 수 있는 나라는 북한에 식량과 석유를 공급해주는 중국뿐이다. 그러나 일당독재 공산국가인 중국이 가장 꺼리는 것은 한반도가 대한민국에 의해 평화적으로 통일되는 것이다. 중국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민주국가인 대한민국과 미국의 군대를 마주하는 시나리오를 두려워한다. 따라서 완충 역할을 하는 북한의 붕괴를 원하지 않는다.

이순신을 등장시킨 불차탁용(不次擢用)

중국의 통치철학은 1911년 이종오(李宗吾)가 <초한지>의 처세술을 정리해놓은 ‘후흑학(厚黑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얼굴은 두꺼워 뻔뻔하고 검은 속내는 음흉하다’는 후흑학은 동양의 마키아벨리즘이라고도 불린다. 힘을 기를 때까지 납작 엎드리는 도광양회(韜光養晦), 한반도 사드 배치를 반대하고 태평양에서 미국, 일본 및 주변국들과 대치하는 등 거침없는 협박인 돌돌핍인(咄咄逼人)은 그와 맥락을 같이한다. 중국은 1950년 ‘미군을 물리치고 조선(북한)을 돕는다’는 항미원조(抗美援朝) 기치를 내걸고 중공군 50만 명을 보내 한반도의 통일을 가로막았다. 중국은 1961년 북한과 조·중 우호조약을 맺어 북한이 존망의 위기에 처했을 때 자동 개입하는 연계선도 마련해놓았다.

1591년 2월 13일 이순신은 정읍현감(종6품)에서 무려 7단계를 뛰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정3품)가 된다. 왜란의 조짐이 심상치 않자 선조는 계급에 구애 없이 유능한 장수를 선발해 전방에 배치하는 ‘무신불차탁용(武臣不次擢用)’을 지시했다. 그때 우의정 류성룡이 이순신을 수군장수로서 발탁한 것은 참으로 천행이었다. 임진왜란 발발 1년 2개월 전에 전라도 여수에 부임한 이순신은 관하 5관(순천, 흥양, 광양, 낙안, 보성), 5포(사도, 여도, 녹도, 방답, 발포)의 군선과 군기, 군량을 점검하고 군사훈련을 시켰다. 지자·천자총통을 탑재하는 비장의 첨단무기인 거북선을 창제해 돌격선 임무를 맡겼다. 탐망 정보전에 능하고 선승구전(先勝求戰, 이길 방도를 마련해놓고 싸움)의 위기관리능력을 발휘한 이순신은 23전 23승이라는 연승무패를 기록해 세계 해군사에서 ‘군신(軍神)’ 반열에 올랐다.

1592년 4월 13일 선발대장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 등이 이끄는 왜군 15만8000여 명이 줄줄이 부산포에 상륙했다. 조총(鐵砲, 뎃포)부대를 앞세운 왜군은 파죽지세로 진격해 ‘무(無)뎃포’의 조선군을 살육하며 20일 만에 한성에 무혈 입성했다. 4월 30일 한양을 버리고 몽진에 나선 선조는 5월 8일 평양, 7월 3일 의주에 도착했다. 그리고 여차하면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에 망명할 뜻을 밝혔다. 뼛속까지 존명사대 정신으로 가득하던 선조는 사신을 급파해 원군을 요청했다. 7월 10일 명나라 조승훈(祖承訓)이 이끄는 5000명의 선발대가 압록강을 건너와 17일 평양성을 공격했으나 왜군이 가진 조총의 위력만 실감하고 요동으로 퇴각했다. ‘천군(天軍)’이랍시고 부린 만용의 결과였다.

선조는 명나라 조정에 재차 파병을 애걸복걸했고, 그에 따라 1593년 1월 7일 제독 이여송(李如松)이 이끄는 본진 5만 명이 ‘항왜원조(抗倭援朝)’의 기치를 내걸고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왔다. 그리고 패장 조승훈(부총관)과 도체찰사 류성룡이 이끄는 조·명 연합군은 평양성을 함락했다. 명군은 불랑기포, 멸로포, 호준포 등 서양식 화포를 발사해 평양성을 타격했다. 승기를 잡은 이여송은 여세를 몰아 개성을 거쳐 벽제까지 남하했다. 그러나 1월 27일 고양의 여석령에 매복해 있던 왜군의 기습을 받아 벽제관 전투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혼비백산, 겁을 잔뜩 집어먹은 명군은 개성으로 물러났다가 멀찌감치 평양으로 후퇴했다.

그때 ‘전시 재상’ 류성룡이 이여송에게 후퇴해서는 안 되며 전열을 정비한 후 한양의 왜군 총본부를 쳐부숴야 한다고 간청했으나 소귀에 경 읽기였다. 이여송은 “군사와 말먹이를 준비하지도 못한 주제에 무슨 전투냐”며 류성룡을 무릎 꿇리고 군법으로 처벌하겠다고 협박했다.

KBS에서 방영한 ‘징비록’의 한 장면.KBS에서 방영한 ‘징비록’의 한 장면.

명나라가 조선을 위기에서 구했다고?

임진왜란은 군량 전쟁이었다. 1592년 7월에 파병됐다가 패하고 돌아간 조승훈 군대 5000명에게 보급한 한 달 치 식량은 4500석, 뒤이어 나온 이여송의 군대 5만 명에게 배당된 1년 치 군량은 무려 50만 석이었다. 당시 조선의 총 세입이 60만 석이었으니 이렇게 많은 군량을 조선은 마련할 수가 없었다. 군량 마련으로 백성들은 죽어났다. 1594년에는 백성 사이에서 서로 잡아먹는 ‘인상식(人相食)’이 횡행했고 전염병이 돌았다. 7년 전쟁 내내 군량 동원에 동분서주했던 류성룡 대감의 눈물은 마를 날이 없었다.

조승훈 군대의 1차 평양성 패배로 왜군 세력이 만만치 않음을 간파한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石星)과 조선에 파견된 경략(총지휘관) 송응창(宋應昌)은 무뢰배 출신인 유격대장 심유경(沈惟敬)을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보내 평양 강복산에서 강화협상을 시작했다. 우여곡절 끝에 1592년 9월 1일부터 50일 동안 휴전협정을 맺기로 했다. 그리고 이여송이 벽제관 전투에서 패배하자 1593년 4월 8일 용산에서 두 번째 회담이 열렸다.

1593년 6월 28일 진주성 2차 공방전 중에 강화 교섭차 명나라 사신 사용재(謝用梓), 서일관(徐一貫)과 함께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가 일본 규슈의 나고야(名護屋)성에 갔을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나라 사신에게 화건 7조(和件 七條)를 제시했다. 그 속에는 ‘조선 8도 가운데 북 4도와 한성은 조선에게 돌려주고 남 4도(경기, 충청, 전라, 경상)는 일본에 할양한다’는 조항이 들어 있었다. 당시 명나라는 황제(신종)의 무능과 환관의 전횡, 이민족의 발호 등으로 재정이 고갈된 상태였다.

따라서 이 전쟁을 빨리 끝내고자 했다. 조선의 북쪽 땅을 요동 방어의 울타리로 삼는 번리지전(藩籬之戰)으로 처리할 심산이었다. 일본은 전쟁을 확대하지 않고 조선 남부 4도를 할양받아 조선 지배를 확실하게 보장받는 것이었다. 군량 조달과 조선 땅의 분할 저지에 목숨을 걸었던 류성룡은 “우리 강토의 땅은 한 자 한 치도 왜에게 넘겨줄 수 없다”며 땅을 치고 울부짖었다.

1594년 4월 명의 황제 특사인 선유도사 담종인(譚宗仁)은 ‘왜군을 절대 토벌하지 말고 조선군을 모두 해체해 고향으로 돌려보내라’는 금토패문(禁討牌文)을 이순신 앞으로 보냈다. 거만한 자세로 왜군을 얕보던 명군은 왜군과 15차례 싸웠건만 제2차 평양성 전투를 빼고는 모두 패배했었다. 그런데 바다 싸움은 전혀 달랐다. 연전연승하는 이순신의 수군을 붙들어매지 못하면 강화협상에 걸림돌이 될 것은 명약관화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리에 이순신은 통분함을 감추지 못하고 담종인에게 ‘답담도사종인금토패문(答譚都司宗仁禁討牌文)’이란 항의서를 보냈다. ‘단 한 척의 적선도 돌려보내지 않겠다’는 ‘편범불반(片帆不返)’의 정신이 충만했던 이순신은 목숨을 걸고 명 황제의 지시에 분연히 맞선 것이다. 1593년 2월 도원수 권율이 행주산성에서 대첩을 거두자 송응창은 권율에게 패문을 보내 왜와 싸워 이긴 것을 질책했다. 그해 6월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조선군이 참패하고 모든 백성들이 도륙당했지만, 그는 사신 심유경을 왜군 진영으로 보내 왜군의 만행을 두둔하는 발언을 하게 했을 정도였다. 피아가 구분되지 않는 이상한 전쟁이었다.

명나라는 조선을 위기에서 구했다는 ‘재조지은(再造之恩)’을 강조하며 내정 간섭을 일삼았고, 사신들은 온갖 뇌물을 요구했다. “의주에서 서울에 이르는 수천 리에 은과 인삼이 한 줌도 남지 않았고, 조선 전체가 전쟁을 치르는 것 같았다”고 <선조실록>은 전한다. 조선의 입장을 대변하던 류성룡이 얼마나 미웠는지 1593년 4월 명군의 총병(摠兵) 사대수(査大受)는 류성룡의 군관 사평(司評, 정 6품) 이충이 왜군을 사살했다며 폭행해 중상을 입혔다.

정유재란 때 명나라 제독 진린(陳璘)은 사로병진작전(四路竝進作戰)에 따른 수로군(水路軍) 대장으로 1598년 7월 16일 전남 완도의 고금도에 도착해 이순신의 수군과 합류했다. 진린의 임무는 통제사 이순신과 함께 서로군(西路軍) 대장 유정(劉綎) 제독과 도원수 권율의 육군과 연합해 순천왜성에 웅거하고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를 사로잡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니시의 끊임없는 뇌물 공세로 유정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다 퇴각했고, 역시 뇌물을 받은 진린도 “퇴각로를 열어주자”고 하다가 이순신의 간곡한 청에 마지못해 9월 16일 노량해전 때 조·명 연합수군함대를 결성했다.

진린이 고금도에 내려온 지 3일 만에 벌어진 절이도 해전에서 그의 패악한 본색이 드러났다. 이순신이 처음 겪은 진린에 대한 장계가 <선조실록> 1598년 8월 13일자에 기록돼 있다. “멀리서 적선을 바라보고는 원양(遠洋)으로 피해 들어간 진린은 우리 군사들이 참획한 수급을 보고 그 관하(管下)를 꾸짖어 물리치고 이순신에게 공갈 협박을 가하여 못하는 짓이 없었다. 그래서 이순신이 마지못해 40여 급을 나눠 보내주었다. 또 계유격(季遊擊)에게도 5급을 보냈다.”

진린의 명군은 조선 수군에게 행패를 부리고 백성들을 약탈했다. 참을 수 없었던 이순신은 진린에게 “백성들과 함께 떠나겠다”고 하자 진린이 만류했다. 그때 이순신은 “귀국의 군사들이 나를 속국의 장수라 하여 조금도 거리낌이 없다. 그러니 내게 그들을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을 허락해준다면 서로 보존할 도리가 있지 않겠느냐”라고 하여 진린의 승낙을 얻어냈다.

‘망전필위’ 교훈 잊고 또다시 당한 정유재란

류성룡(남인)의 피맺힌 절규인 ‘망전필위(忘戰必危, 전쟁을 잊으면 반드시 위태로워진다)’ 의 외침을 당색이 다른 중신들은 귀 밖으로 흘려보냈다. 왜란이 끝난 뒤 우리 민족 특유의 급망증(急忘症)이 도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태평무사하다가 30년도 안 돼 북쪽 오랑캐인 여진으로부터 두 차례 침범(1627년 정묘호란과 1636년 병자호란)을 당하고 말았다. 그때 끌려간 여성이 50만 명이 넘었고, 남은 백성들은 콩가루가 됐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류성룡은 북인으로부터 주화오국(主和誤國), 즉 일본과 화해를 주도해서 나라를 망쳤다는 탄핵을 받고 삭탈관직당한 뒤 고향 안동에 내려와 <징비록(懲毖錄)>을 피와 눈물로써 집필했다.
“예기징이비후환(豫其懲而毖後患,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함), 지행병진(知行竝進, 알면 행함)함이 곧 유비무환(卽有備無患, 대비하면 화를 당하지 않음)이다.”


류성룡은 한양 건천동에서 어린 시절을 함께했던 이순신이 장군이 될 인재임을 일찍이 알아보고 난세에 ‘위대한 만남’이란 인연을 맺었다. 그의 ‘징비정신’은 이순신의 선공후사(先公後私), 임전무퇴(臨戰無退), 필사즉생(必死卽生)과 백의종군 후의 살신성인(殺身成仁)과 그 맥을 같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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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철 이순신 인성리더십 포럼 대표
명지대 교육학 박사. 중앙일보 사회부 기자, 월간중앙 기획위원, 성결대 파이데이아학부 강의교수, 명지대 및 명지대 대학원 겸임교수 등 역임. 저서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블로그 yisoonshin-humanleader.tistory.com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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